미의 근원 제5절 비례에 대한 재고
미의 근원
제5절 비례에 대한 재고
에드먼드 버크
내가 만일 틀리지 않았다면, 비례를 옹호하는 많은 편견들은 아름다운
신체들에서 발견되는 어떤 특정한 척도들을 관찰함으로써 생겨난 것이
아니라, 미와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되어온 기형성이 미에 대해 갖는 관계에
관한 그릇된 관념에서 생겨난 것이다. 이 원리에 따라, 기형성의 원인들이
제거될 때 자연스럽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미가 도입된다는 결론이 도출 되었다.
나는 바로 이것이 오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형성은 미에 반대된 것이 아니라
완전한 공통 형상(Complete Common Form)에 반대되는 것이기 떄문이다.
만일 어떤사람의 한쪽 다리가 다른 쪽 다리보다 짧다면, 그사람은 기형이다.
우리가 사람에 대해 갖는 전체 관념을 완성하기에 뭔가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결과는 사고로 인한 장애나 절단의 경우처럼 자연적인 결함에 의해서도
생길 수 있다. 따라서 만일 등이 굽었다면 그 사람은 기형이다. 그의 등은 이상한
형태를 갖고 있고 그것은 어떤 질병이나 불운의 관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만일 어떤 사람의 목이 길거나 짧다면, 우리는 그가 그 부분에서 기형
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그런 식으로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사람은 길이가 똑같고 모든 면에서 서로 비슷한 다리를 갖고 있고, 정상
적인 크기의 목을 갖고 있고 등이 상당히 똑바른데도, 그에게서 조금도 미를 감지할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언제건 확인할 수 있다. 참으로 미란 관습의 관념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이기 때문에 실제로 그런 식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일은 지극히 드물고도
흔하지 않다.
아름다운 것은 기형적인 것 못지않게 그 참신성 때문에 우리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이것은 우리에게 친숙한 종류의 동물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만일 새로운 종이 나타난다면, 우리는 결코 비레의 관념에 대한 관습이 정착되기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것이 아름다움이나 추함에 관해 결정짓는다.
이 사실은 미의 일반적인 관념이 자연적인 비례 때문이 아니듯이 관습에 기인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기형성은 공통된 비례의 결핍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어떤 대상에게서 그러한 비례들의 존재의 필연적인 결과가 곧 미인 인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자연적인 사물들에게서 발견되는 비례가 관습과 유용성에 관계된 것으로 가정한다면,
지속적인 사용과 관습의 본성에 대해 고찰함으로써 적극적이고 강력한 특질인 미가 결코
그것으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도 훌륭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참신성을 열렬하게 추구하는 존재인 반면, 습관과 관습에도 그 못지않게
강하게 고착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사물들을 소유하고 있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별로 감동을 주지
않지만, 그것들이 없을 때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경향을 갖는 것이 모든 사물의 본성이다.
나는 어떤 장소에 자주 들르곤 했고 그때마다 오랫동안 머물렀던 것을 기억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거기서 즐거움을 느꼈다기보다는 일종의 지루함과 염증마저 느꼈다.
나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 채 오고 가고 다시 돌아오곤 했다. 어떤 일 때문에 일과시간에 그곳을
스쳐지나가게 되었을 때 나는 대다히 마음이 불편했고, 나의 옛 습관으로 되돌아오기 전까지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코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자기가 그것을 피우고 있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예민한 후각이 무디어졌기 떄문에 날카로운 자극이 있어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그에게서 코답배갑을 뺏는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안정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듯 기능성과 관습은 결코 쾌의 원인이라고 할 수 없다. 지속적인 사용의 효과는 어떤 종류의
사물이건 그것에 대해 완전히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속적인 사용이 결국에는 많은 사물들의
고통스러운 효과를 제거하는 것처럼 , 다른 것들의 즐거운 효과도 제거하며, 양자의 경우 모두
일종의 평범함과 무관심에 젖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능을 제2의 천성이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적절한 일이다. 그 자연적인 공통 상태는 절대적 무관심의
상태로서, 잠재적 고통이나 즐거움을 기다리게 된다. 그러던 중 우리가 이 상태에서 벗어나거나 그상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어떤 것을 빼앗기게 될 때, 즉 어떤 역학적 원인에서 즐거움을 얻지 못하게 될 때 항상
우리는 고통을 느낀다. 그것은 제2의 천성, 관습,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인간과
다른 동물들이 갖는 표준적인 비례는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적극적인 쾌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의 결핍은 항상 혐오감을 낳는다. 인체의 미의 원인으로 규정된 비례들이 아름다운 신체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 비례들은 모든 인류에게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만일 그 비례들이 발견되는데도 아름답지 않은 신체들이 있다는 것, 미는 흔히 비례없이도 존재한다는것,
그뿐만 아니라 미가 발견될 때는 항상 비례 못지않게 괄목할 만한 다른 원인들에게도 미를 배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이로부터 자연스럽게 함축 되는 것은 비례와 미가 동일한 본성에 속한 관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의 진정한 반대는 불균형이나 기형이 아니라 추다 그리고 추는 적극적인 미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기 전까지
우리는 추에 관한 논의를 시작할 수 없다.
미와 추 사이에는 일종의 무덤덤함의 영역이 있으며, 따라서 그 영역에 배정되는 비율들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의 정념에 아무런 효과를 일으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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