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2. 13. 13:42

정념에 관한 고찰

정념에 관한 고찰

 

에드먼드 버크(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

 

제1절 참신성

 

우리가 인간의 마음에서 발견할 수 있는 최초의 가장 단순한 감정은 호기심이다.

내가 말하는 호기심이란 우리가 참신성에 대해 갖는 욕구이건 , 참신성에서

얻는 즐거움이건 모두를 의미한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이 뭔가 새로운 것을

찾으려고 늘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을 본다. 어린아이들은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마다 거의 아무것도 가리지않고 대단한 열정을 갖고 주목한다. 어린아이들의

주의력은 모든것을 향하고 있는데,왜냐하면 인생의 단계에서는 모든 것이 참신성의

매력으로 마음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참신성만으로 우리를 매료시키는 것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 우리에게

머물러 있지 않기 때문에, 호기심은 모든 감정들 중 가장 피상적인 것이다. 호기심의

대상은 항상 바뀐다. 호기심은 매우 민감한 욕구(Appetite)를 갖지만 아주 쉽게 충족

된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현기증과 초조 그리고 불안감의 외양을 띤다.

호기심은 그 본성상 매우 능동적인 원리를 갖는다. 그것은 거의 대부분의 대상들을

재빠르게 훑어보며, 흔히 자연에서 나타나는 다양성을 금방 간파한다. 똑같은 것들은

반복되기 일쑤이고, 반복될 때 즐거움의 효과는 점점 줄어든다. 간단히 말해서, 인생의

사건들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될 떄쯤이면, 많은 것들이 참신성 외의

다른 힘들에 의해,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서 호기심 외의 다른 정념들의 힘애 의해

마음이 영향을 받을 수 있게끔 적응하지 않을 경우, 싫증과 지루함의 감각 외에 달리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 이러한 힘들과 정념들은 그 자체로

고찰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힘들이 무엇이건 , 또는 그것들이 어떤 원리에 따라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건, 그 힘들은 일상적이고 저급하게 사용됨에 따라 진부하고 매력도

없는 무덤덤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어느 정도는 참신성은 마음에 작용하는 모든 수단

들이 반드시 가져야 할 재료들 가운데 하나임이 틀림없다. 그리고 호기심은 모든 우리의

정념들에 조금씩 혼재되어 있다.

 

제2절 고통과 쾌

 

따라서 인생에 상당한 연륜을 가진 사람들의 정념들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목적을

위해 고안된 대상들은 어느정도의 참신성 뿐만 아니라 다른 원인으로부터 고통이나 쾌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고통과 쾌는 정의를 내릴 수 없는 단순 관념

(Simple ideas)들이다. 사람들이 그릇된 감정을 느끼는 일은 별로 없지만, 그 감정들의 이름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에 추론하는 데서 오류를 범하는 일은 매우 흔하다. 많은 사람이 고통(Pain)

은 필연적으로 어떤 쾌(Pleasure)의 제거로부터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쾌는 어떤 고통의 정지나

완화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기는 고통과 쾌가 가장 단순하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작용할 때 그것들은 각각 적극적인 본성을 가지며, 그것이 존재하기 위해 결코 서로에게 의존

하지 않는다. 나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의 마음은 종종 고통도 아니고 쾌도

아닌 상태에 놓이곤 하는데, 그것을 나는 무관심의 상태라고 부르겠다. 내가 이런 무관심의

상태에서 적극적인 쾌의 상태로 옮겨갈 때, 내가 어떤종류의 고통의 매개를 경유해야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만일 무관심이나 편안함 또는 평정, 그 무엇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런 상태에서

당신이 갑자기 음악 연주회를 즐기게 된다면, 또는 우미한 형태와 밝고 생동감 넘치는 색깔들을

가진 어떤 대상이 당신 앞에 나타난다면, 또는 장미 향기를 맡고 만족스러움을 느낀다면, 또는 

이전에 전혀 갈증을 느끼지않던 상태에서 어떤 쾌적한 종류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거나, 배고프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연한 살코기의 맛을 보게 된다면 청각, 후각 그리고 미각 등 모든 감각에서 

당신은 분명히 쾌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러한 만족감을 느끼기 전의 당신의 마음 상태에 대해 묻는다면, 당신은 특정한

종류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면 여러가지 쾌로 다양한 감각들을 만족

시키고 난 후 당신은 그 쾌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어떤 고통이 뒤따라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반대로, 똑같은 무관심의 상태에 있던 사람이 주먹으로 통렬하게 맞는다거나, 어떤 쓴 약을 먹는

다거나, 거칠고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고 가정해보라. 이 경우 쾌의 제거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자극을 받은 모든 감각에서 매우 뚜렷한 고통을 느낄 뿐이다.

 아마도 그런 경우들에  고통은 그 사람이 과거에 느꼈던 쾌의 정도가 너무 낮았기 때문에 제거될

때에야 비로소 지각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 쾌가 제거될 때 고통이 발생한 것 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것은 자연 상태에서 확증할 수 없는 미묘한 문제 같다.

왜냐하면 만일 그 고통 이전에 내가 어떤 적극적인 쾌도 느낄 수 없다면, 나는 그러한 것들이 존재한다고

판단 내릴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쾌는 그것이 느껴질 때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고, 그 이유도 똑같다. 나는 쾌와 고통이 대조될 때만 존재할 수 있는 

종류의 관계에 불과하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전혀 서로에게 의존

하지 않는 적극적인 고통과 쾌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식별할 수 있다. 나 자신의 감정들을 통해 

이것만큼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다른 어떤 것과의 관계에 관한 관념을 전혀 갖지 않고도 나는 

그러한 감정들을 각각 지각할 수 있다. 카이우스는 발작에 시달린다. 그는 실제로 고통을 느낀다.

고문대 위에서 그는 더 큰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고문대의 이 고통은 어떤 쾌의 제거로부터 발생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기꺼이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으로서, 발작은 단일한 쾌 또는 고통 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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