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고의 근원
에드먼드 버크(숭고와 미의 근원을 찾아서)
제1절 숭고에 의해 야기되는 정념에 관하여
자연의 장대함과 숭고에 의해 야기되는 정념은 그 원인들이 가장 강력하게
작용할 때 경악(Astonishment)이 된다. 그리고 경악은 어느정도의 공포감이
견지되면서 모든 운동이 정지되는 마음의 상태다.
이 경우, 마음은 그 대상에게 완전히 압도되기 때문에 다른 어떤것도
생각할 수 없고, 따라서 그 상태를 초래한 대상에 대해서도 추론을 능가하며,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우리를 몰고간다.
이미 말했듯이,경악은 강도가 가장 큰 효과가 낳는 효과다. 그 보다 낮은 정도의
효과들은 찬양(Admiration), 경외(reverence), 존경(respect)이다.
제2절. 공포
공포(Terror)만큼 마음에서 모든작용과 추론의 힘을 앗아가는 것도 없다.
왜냐하면 공포란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apprehension)이므로
실제의 고통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포의 그러한 원인이 규모의 광대함에 있거나 또는 그렇지 않다해도,
시각적으로 무시무시한 것은 무엇이든지 숭고적이다.
잠재적으로 위험한 대상을 하찮게 보거나 경멸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크지는 않지만 공포의 대상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숭고의 관념을 환기 시킬 수
있는 동물들이 많이있다. 뱀이나 유독한 거의 모든 종류의 동물들이 그러하다.
그리고 크기가 큰 것들에 관해서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공포의 위험스러운
관념과 연관시킬 수 있다면, 더 큰 것과 비교하지 않더라도 가능하다.
광대한 평야는 분명히 사소한 관념이 아니다. 그러한 평야가 보이는 전망은
대양의 전망 못지않게 광대하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대양만큼 광활한 어떤
것으로 마음을 채워줄 수 있을까? 공포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수 있지만,
이 경우 그 이유는 바로 대양이 결코 사소한 공포의 대상이 아니라는것이다.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어떤 경우든지, 더 명시적이건 더 암묵적이건, 공포가
숭고의 지배적 원리임이 확실하다.
여러 언어들은 공포의 관념들의 유사성을 뚜렷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언어들은 경악이나 찬양의 양태들과 공포의 양태들을 아무런 구별없이
똑같은 낱말로 지칭할 때가 많다. 그리스러 담보스는 공포나 놀라움이며,
데이노스는 무시무시하거나 존경스러운 것을 의미한다. 아이디에오는
경외 또는 경이를 가리킨다.
라틴어 베레오르는 그리스어의 아이디에오와 같다. 로마인들은 스투페오라는
동사를 사용했는데, 그것은 놀란 마음의 상태를 강하게 묘사하는 낱말로, 순수한
공포나 경악의 효과를 표현하는데 쓰인다. Attonitus(아토니투스: 기겁하다)
라는 낱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관념들과 연관된 표현이다. 프랑스어
"Etonnement"(에톤느망)과 영어의 "Astonishment"와 "Amazement"도 공포와
놀라움이병존하는 유사한 감정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언어들에
대해 좀더 일반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라면 이런 것들 못지않게 놀라운
사례들을 더 많이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제3절 불명료성
일반적으로 무엇인가 두려운 것으로 만들려면 불확실성이 필요한것 같다.
우리가 위험의 전모를 파악할 때, 또는 우리가 위험을 경계하는 습관을 기를 수
있을 때, 많은 불안이 사라진다. 모든 경우의 위험에서, 밤이 우리의 두려움을
얼마나 증폭시키는지, 그리고 아무도 명확한 관념을 가질 수 없는 유령이나
도깨비에 대한 생각들이 마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는 사람
이라면, 누구나 그 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때문에 그러한 불확실한
존재들을 둘러싼 민간설화들이 생겨난 것이다.
인간의 정념 위에, 주로 공포의 정념위에 세워진 잔악한 정부들은 자기들의 수장을
될 수 있는 한 대중의 눈에서 멀리 떼어놓는다. 그러한 전략은 많은 종교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거의 모든 이교도 신전들은 음침하다. 심지어 오늘날 미국의 야만적인
신전들에서도, 경배하기 위해 만들어진우상들은 성별된 오두막의 어두운 곳에 놓여
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해 드루이드교 사제들은 가장 어두운 숲 속에서, 그리고 가장
오래되고 머리가 가장 큰 떡갈나무 그늘에서 제식을 거행했다.
이렇게 표현해도 될는지는 모르지만, 불확실성의 현묘한 힘에 의해 가장 강렬한 빛을
비춤으로써 무시무시한 것들을 드높이는 비결을 밀턴만큼 완벽하게 터득한 사람도
없을 것 같다. 실낙원 제2권에서 죽음에 대한 그의 서술은 수많은 찬사를 받으며 연구
되었다. 우울한 기분이 감도는 화려함과 함께, 그가 얼마나 의미심장하고 표현성이
풍부한 불확실성의 붓놀림과 색조로 공포의 왕의 초상화를 완성했는지는 가히 놀랍다.
다른 형상은, 만일 그것이 형상이라 불릴 수있다면, 그 형상은
몸통이나 관절이나 사지를 전혀 구별할 수 없다;
또는 실체라고 불릴 수 있다면 그 그림자는 실체처럼 보인다.
그것들은 각기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이고, 그는 밤처럼 어둡게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각기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이고, 그는 밤처럼 어둡게 서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열 곱절의 격노처럼 맹렬하고 , 지옥처럼 무시무시하다.
그리고 죽음의 창을 던진다.
머리처럼 보였던 것은 왕관의 초상을 얹은 것이었다.
이 묘사에서 모든것은 극도로 어둡고, 불확실하고, 혼돈스럽고,
무시무시하며 그리고 숭고적이다.
제4절. 정념의 명료성과 불멸료성의 차이에 관하여
어떤 관념을 명료하게 만드는 것과 그것으로 하여금 상상력에 영향을 미치게
만드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만일 내가 궁전이나 신전, 또는 풍경을 그린다면,
나는 그러한 대상들에 대해 매우 명확한 이미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 경우(모방의 효과를 창출하기 위해)나의 그림은 기껏해야 실재의 궁전,사찰
또는 풍경이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정도와 같은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뿐이다. 그 반면에,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그러한 서술로 나는 더 강렬한 감정
(Emotion)을 환기시킬 수 있다. 우리는 경험은 이 점을 끊임없이 입증해준다.
마음이 느끼는 정서들(affections)을 이마음에서 저마음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수단은 언어다. 다른 어떤 의사소통 수단도 언어에 비해 너무나
불충분하다. 그리고 이미지의 명료성은 정념에 영향을 미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에, 이미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고도, 정념을 불러
일으키기에 적합한 소리에 의해 얼마든지 정념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것에 관해서는 이미 널리 인정된 기악 음악의 강력한 효과들로부터 충분한
증거를 찾을수 있다. 실제로 높은 수준의 명료성을 가진 것은 어떤 종류의 열광에
대해서나 적이 되기 때문에, 고도의 명료성은 정념에 영향을 미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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