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4. 9. 16:55

니코마코스 윤리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아리스토텔레스

제1권

제1장  좋음과 목적

모든 기예(techne)와 탐구(methodos),또 마찬가지로 행위와

선택은 어떤 좋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좋음을 모든 것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옳게 규정해 왔다. 그러나

추구되는 여러 목적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것 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어떤것 들의 경우 그 목적은 활동(energia)이며, 다른 것들의

경우에는 활동과 구별되는 어떤 성과물(ergon)이기 때문이다.

행위와 구별되는 목적이 있는 경우에 있어서는 그 성과물이 본성적으로

활동보다 더 낫다.

그런데 행위, 기예, 학문(episteme)들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에 그 목적들

또한 많게 되는 것이다. 의술의 목적은 건강, 조선술의 목적은 배, 병법의

목적은 승리, 가정경제학(oikonomike)의 목적은 부이니까.

그런데 이러한 것들 중에서 모두 하나의 능력(dynamis)아래에 있는

것들은 , 가령 말굴레 제작술과 마구의 제작에 관계되는 다른 모든 기술들은

마술 아래에 놓이며, 마술자체와 전쟁에서의 모든 행위들은 병법 아래에

놓이게 되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기예들도 또 다른 것들 아래 놓이게 된다.

그래서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총기획적인 것의 목적이 그것 아래에 놓이게

되고, 같은 방식으로 다른 기예들도 또 다른 것들 아래 놓이게 된다. 그래서

이 모든 경우들에 있어서 총기획적인 것의 목적이 그것의 아래에 놓이는 다른

목적들보다 더 선택할 만한 것이다. 전자를 위해 후자가 추구되는 것이니까.

여기서 활동 자체가 행위의 목적인지, 아니면 활동과는 구별되는 다른 목적

인지는 앞에서 언급한 학문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제2장 최고선과 정치학

 

그래서 만약 행위될 수 있는 것들(prakton)의 목적이 있어서 우리가 이것은

그 자체 때문에 바라고, 다른 것들은 이것 때문에 바라는 것이라면, 또우리가

모든 것을 다른 것 때문에 선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이렇게 무한히 나아갈 것이며, 그 결과 우리의 욕구는 공허하고 헛된 것이 될것이

기 때문이다.)이것은 좋음이며 최상의 좋음(ariston, 최고선)일 것이라는 사실이

명백하다. 그러니 이것에 대한 앎이 우리의 삶에 있어서도 큰 무게를 가지지 않겠

는가? 또 마치 과녁을 가지고 있는 궁수처럼 마땅히 그래야 할 바에 더 잘 적중

시킬 수 있지 않겠는가?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느 적어도 개략적으로나마

과연 이것이 무엇인지, 또 어떤 학문에, 혹은 어떤 능력에 속하는 것인지 파악

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으뜸가는 학문, 가장 총기획적인 학문에 속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치학이 바로 그러한 학문인 것 같다. 왜냐하면 폴리스 안에 어떤 학문들이

있어야만 하는지, 또 각각의 시민들이 어떤 종류의 학문을 얼마나 배워야 하는지를

정치학이 규정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가령 병법이나 가정경제학, 또 수사학처럼

가장 높이 평가받는 능력들까지도 정치학 밑에 놓여 있음을 보기 때문이다.

또 정치학은 나머지 실천적인 학문들을 이용하면서, 더 나아가 무엇을 행해야만 하고

무엇을 삼가야만 하는지를 입법하기에 그것의 목적은 다른 학문들의 목적을 포함할

것이며, 따라서 정치학의 목적은 '인간적인 좋음'일 것이다. 왜냐하면 설령 그 좋음이

한 개인과 한 폴리스에 대해서 동일한 것이라 할지라도, 폴리스의 좋음이 취하고 보존

하는데 있어서 더 크고 더 완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 좋음을 취하고 보존 하

는 일이 단 한 사람의 개인에게 있어서도 만족스러운 일이라면, 한 종족과 폴리스들에

있어서는 더 고귀하고 한층 더 신적인 일이니까. 따라서 우리의 탐구는 일종의 정치학

적인 것으로서 이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이다.

 

제10장  행복과 운명

 

12.사실 많은 일들이 우연에 따라 일어나며 그 크고 작음에 따라 차이를 가진다.

행운 중에서 작은 것은 불운 중에서 작은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 삶의 균형을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 큰 일들이 좋은 쪽으로 많이 일어난다면 삶을

더 복 받은 것으로 만들 것이다.(이것들 자체가 원래 삶에 곁들여져 아름다운 꾸밈

을 보태 주며, 그것들의 사용은 고귀하고 신실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큰 일들이 

나쁜 쪽으로 많이 일어나면 지극한 복을 짓누르고 상하게 한다. 그것들은 고통을

가져오고 많은 활동들을 방해 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귀함(kalon)은 이러한

불운들 가운데서도 빛을 발한다. 누군가 크고 많은 불운들을ㅡ고통에 무감각해서가

아니라 고결하고 담대한 성품의 소유자이기 때문에ㅡ침착하게 견뎌 낸다면 말이다.

 

 

제4권

 

제5장 온화

 

온화(praotes)는 노여움과 관련한 중용이다. 이 중용에도 이름은 없고, 관련된 극단들에도

거의 이름이 없기에 우리는 '온화'란 말로 그 중용을 가리킬 것이다. 온화 역시 이름이

없는 모자람 쪽으로 기울여져 있는 것이긴 하지만 지나침은 일종의 '화를 잘내는 것(성마름)"

이라 불릴 것이다. 화를 내게 하는 것은 여럿이고 서로 다른 것들이지만, 문제가 되는 감정

(pathos)은 노여움(orge)이니까

마땅히 화를 낼 만한 일에 대해 마땅히 화를 낼 만한 사람에게 화를 내는 사람은, 더 나아가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때, 마땅한 시간 동안 화를 내는 사람은 칭찬을 받는다. 그렇다면

온화가 칭찬 받는 것인 한, 이런 사람이 온화한 사람일 것이다. 온화한 사람은 동요가 없는

또 감정에 의해 휘둘리지 않고 이성이 명할 것처럼 그렇게, 화를 낼 만한 대상에 대해 화를

낼 시간 동안 노여워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잘못을 한다면) 모자람의 방향

으로 더 잘못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온화한 사람은 보복을 하는 사람이기보다 차라리 용서를

해주는 사람이니까

이 방면에서의 모자람은, 그것이 일종의 '화낼 줄 모름'이든 다른 무엇이든, 비난을 받는다.

마땅히 화를 내야 할 일에 대해 화를 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릭석은 사람으로 생각되고,

마땅한 방식으로 화를 낼 줄도, 마땅한 때에 마땅한 사람에 대해서 화를 낼 줄도 모르는

사람 역시 어리석은 사람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지각 할 줄도 모르고 고통을

느낄 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화를 내지 못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방어할 줄도 모르는 사람

이라고 여겨지니까. 또 모욕을 당하고도 그냥 참는 것, 자신의 가족이나 친구들이 당한 모욕을

도외시하는 것은 노예적인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제8권

 

제1장 친애에 관한 일반적 견해들과 문제들

 

친애에 관해서는 적지 않은 논쟁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친애를 일종의 유사성으로 규정하고

서로 유사한 사람들을 친구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유유상종'이니, '까마귀는 까마귀끼리

모인다.' 같은 말을 하거나 또는 그와 유사한 말들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모든 옹기장이들은 같은 옹기장이들을 반가워하지 않기 마련이라고 주장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주제에 관해 더 높은 수준에서 더 자연적으로 탐구한다. 에우리피데스는

메마른 땅이 비를 열망하며, 비를 머금은 장엄한 하늘은 땅으로 떨어지기를 갈망한다고 한다.

헤라클레이토스느 대립하는것이 도움이며, 차이가 나는 것들로부터 가장 아름다운 화음이 나온다고,

또 모든 것들은 싸움에 따라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비슷한 것은 비슷한 것을 추구한다고 말하면서 이러한 의견에 반대한다.

하지만 이제 이러한 난제들을 취급하는 자연학적인 논의들은 접어두기로 하자. 현재 우리의 탐구는

고유한 것이 아니니까. 우리들이 탐구하는 것은 인간적인 일들이며 품성과 감정에 관계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루는 문제느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이다. 모든 사람들 사이에서 친애가 성립 하는가?

못된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없는가? 친애의 종류(eidos)는 하나인가, 아니면 그 이상인가?

(친애의 종류가 하나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친애의 정도의 차이르 받아들이기 떄문에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이것은 충분한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서로 다른 종류에 속하면서도 정도의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에 관해서는 이전에 이미 토론한 바 있다.)

 

제2장 친애의 대상

 

사랑할 만한 것(phileton)이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면 이러한 문제들에 관해서는 아마 분명해질 것

이다. 모든 것이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것이 사랑 받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할 만한 것은 좋은 것이나 즐거운 것, 혹은 유익한 것이다. 유익한 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 어떤 좋음이나 즐거움이 생겨나는 것인 듯하다. 따라서 좋음과 즐거움이 목적으로서

사랑할 만한 것인 듯 보인다. 사람들은 좋음을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에게 좋아 보이는 것을

사랑하는 것인가? 경우에 따라서는 양자가 다르기도 하니 말이다. 즐거움에 관련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각자는 자신에게 좋은 것을 사랑하는 듯 보이며ㅡ비록 단적으로 좋은 것이 사랑할 만한 것이긴 하지만

ㅡ 각자에게 좋은것이 각자에게 사랑할 만한 것인 듯하다. 각자는 진정 자신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그렇게 보이는 것을 사랑하니까, 그렇지만(이러한 구별이) 어떤 차이를 가져오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할 만한 것은 그렇게 보이느 것이 될 테니까.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바로 그것을 이유로 사랑하게 되는 것이 세 가지가 있지만 ,무생물에 대한 애호

는 친애라고 말하지 않는다. 무생물에게는 [상대에게] 호응하는 사랑이나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포도주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우스운 일일 것이기 떄문이다. 만약 그렇게

바란다면 포도주가 잘 보존되어 나중에 자신이 갖게 되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친구가 잘 되기를 바랄 때는 친구를 위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잘 되기를 바라는데도 상대편에게는 동일한 [바람]이 생기지 않는 경우, 우리는 그러한 바람을 가진

사람을 선의 (eunoia)를 가진 사람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친애를 쌍방 간에 성립하는 선의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서로의 선의를] 모르지 않는"이라는 조건을 덧붙여야 하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훌륭하며 유익한 자라고

생각해 선의를 갖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들은 서로에게 선의를 가지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나

각자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누가 감히 친구라 부를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친구들은]위에서 언급했던 것 중 어느 하나를 이유로, 서로에 대해 선의를 갖고 있으며 상대방이

잘 되기를 바라고 또 동시에[그러한 사실을] 서로 모르지 않아야 한다. 

 

제3장 친애의 세 종류

 

2유익을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돌아오는 어떤 좋음을 이유로 상대에게 애착을

가지는 것이며, 즐거움을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어떤 즐거움이 돌아오는 것을

이유로 그러한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받는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 사람인 한 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그가 유익을 주는 한,혹은[자신들이]즐거운 한 사랑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우연적인의미에 따른(kata symbebekos) 친애이다. 사랑받는 사람이

그 자체로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좋음이나 즐거움을 주는 한에서만 사랑받기 때문이다.

3이러한 친애는[사랑을 주고 받는 친구들이] 계속 이전 같지는 않을 때 쉽게 해체되고 만다.

더 이상 즐거움이나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될 경우 그들의 사랑 역시 멈추게 된다. 그런데

유익한 것은 지속적이지 않고 경우에 따라 유익한 것이 달라지기도 한다. 따라서 그들이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그 이유가 사라지고 나면 친애 역시 해체된다.친애가 바로 그러한 것을

지향 했으니까.

5가장 완전한 친애는 좋은 사람들, 또 탁월성에 있어서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친애이다

이들은 서로가 잘 되기를 똑같이 바라는데,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그렇게 바라며, 또 그들은 그 자

체로서 좋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친구를 위해 그 친구가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이 최고의

친구이다. 이들이 이러한 태도를 가지는 것은 우연한 것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이유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의 친애는 그들이 좋은 사람인 한 유지된다. 그런데 탁월성은 지속

적인 것이다. 각자는 또 단적으로도 좋은 사람이고 친구에 대해서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사람들은

단적으로도 좋으며 서로에 대해서도 도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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