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8. 6. 21:43

교육문제 3 : 잘못된 교육

Everybody's political what's what?

george bernard shaw



오늘날 교육은 일찍이 신앙의 시대에는 한 번도 겪지 않았던 정치적 타락을 경험하고 있다. 신앙의 시대


즉, 중세 유럽에는 오직 하나의 신과 하나의 교리만이 있었고, 그에 대한 반대의견은 철저히 묵살 당했다.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이단으로 몰려 산 채로 화형에 처해지기 마련이었다. 모든 사람이 기독교나 이슬람


교도로 교육받았던 것이다. 성경과 코란은 모든 도덕률의 기초가 되었고, 만고 불변의 확고부동한 진리로


여겨졌다. 이러한 관점은 지금도 남아있다. 런던의 미들랜드 호텔에 열렸던 모임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모든 종파의주요 성직자들과 각당의 정치인들이 대기업 사장단과 협의하기 위해 모였고, 도덕 및 종교적 


원칙에 대해 논의하고 가능하면 합의를 도출하려고 했다. 일찍이 러스킨은 제계 거물들의 양심에 호소한


바 있다. 그들을 산업계의 수장이라고 치켜 세우면서, 완전히 정직한 상인이라면 고객을 속이느니 차라리


목숨을 내놓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러스킨은 모든 작업에 대해 그와 같은 정직성 심사를 적용했다.


그 모임에 프로테스탄트 주교는 참석하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영국교회 주교들 중 일부는 사업가들과의


화합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카톨릭 추기경은 참석에서 발언했고, 시에서 대여하


는 주말농장에 관심이 많은 한 세습귀족이 한 상원을 대표해서 참석했다. 나는 저명한 사회주의자로서 그


날 모임에 연사로 참석했다. 저명한 사회주의자로서 그날 모임에 연사로 참석했다. 나와 추기경과 상원위원


이 발언했다. 모든 연사가 상거래의 고귀함에 대해 설파했고, 후에 로터리 클럽 회원들의 연설이 이어졌다. 


그러나 재계의 거물들은 잠자코 있었다. 결국 의장이 재계의 신념을 밝히라고 명시적으로 요청했다. 재계의


거물들은 잠자코 있었다. 결국 의장이 재계의 신념을 밝히라고 명시적으로 요청했다. 재계의 거물들은 마지


못해 일어나더니 단 한나의 원칙을 언급했다. 자기들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남에게 기대


하는 만큼 남에게 해줄 뿐이라고 했다.


우리는 완전히 할 말을 잃었다. 도무지 빅토리아 시대에 벌어지는 토론이라고 볼 수가 없었다. 마치 중세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그자리를 빠져 나왔다.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자리를 떴다. 경쟁업체가 파산


을 하든 프롤레타리아가 굶어죽든 개의치 않고 최대이윤을 추구하는 것이 경쟁체제에 속한 민간 기업을 지


배하는 규칙이다. 사실상 고용주들은 그래야만 할 것이다. 제아무리 박애주의적인 고용주라 하더라도, 종교


적 신념이나 인정머리 따위는 서랍 안에 꼭꼭 처박아 두고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실제로 러스킨주의 지


식인들을 제외하면, 그런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산업계 거물들의 신심은 신앙의 시대


로 부터내려오는 오래된 습관일 뿐이다. 이 케케묵은 습관은 주일 설교를 들을 때 보이는 반사작용 같은 것


이다. 실제 그들의 사업과 신심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17세기 존 버니언은 <악인의 삶과 죽음>에서 근대 사


업가의 신앙이란 싸게사서 비싸게 파는 것임을 통찰 했다. 버니언은 이렇게 논평한다. "이게 양심 없는 거래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러나 근대 사업가, 다시 말해 (존 버니언의 표현을 빌자면) '악인은 양심 없이 거래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았


다. 악인은 자기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존경받을만한 원칙에 입각해서 거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이윤획득을 정당화하고 스스로 의인이라 자부하기 위해서, 새로운 양심을 고안해낼 필요가 있었다. 악인


은 곧 자기가 원하는 것을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의 가르침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에서 발견해냈다. 프랑스


중농주의자들의 가르침과 애덤 스미스는 교회와 봉건제도의 지배를 받지않는 자유무역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영국교회는 토머스 맬서스 신부의 손을 빌어 악인을 도왔다. 맬서스는 프롤레타리아가 가난하게 된 원인을 인


구과잉과 ' 양심 없이 거래하지 않는 것'에서 찾았다. 이리하여 양심 없는 거래는 양심의 자유로 둔갑했다. 결


국 자유무역은 악인의 슬로건이 되었고, 대학교육과 의회의 정치활동을 통해 경제윤리의 금본으로 자리매김 했


다. 


이렇게 해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라는 위대한 프로테스탄트 혁명에 부합하는 경제윤리의 혁명이 일어났다. 


19세기에 들어서자 다시금 악인의 윤리에 저항하는 반혁명이 절정에 달했다. 반혁명의 선지자인 입센과 니체. 


반혁명의 재간둥이 라 로슈푸코와 오스카 와일드 , 그리고 악인이 뒤집어 쓴 의인의 가면을 벗겨내고 부르주아


라는 새이름을 붙여준 칼 마르크스가 등장한 것이다. 나는 입센과 마르크스의 옹호자였고, 악인-의인-부르주아


의 길이 파멸의 길이라 결론지었다. 거기서 탈출하는 방법은 지성적 측면에서는 자유사상이고, 경제적 측면에서


는 사유재산을 국유화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공산주의다.




생각의 변화가 대중의 동의와 진심 어린 승인을 얻어 확고해지려면, 그러한 생각의 변화를 학교에서


근본적으로 가르쳐야 한다. 나폴레옹이 실패한 이유는 유럽의 모든 아이들을 나폴레옹의 지지자로 만들지 못


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호엔촐레른 왕가가 독일의 학교와 대학에서 우상교육을 단호히 실시하였음에도 불


구하고 실패한 것은 그러한 숭배 교육을 다른 세계에까지 확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독일의 어린아이


들을 히틀러 지지자로 만드는 데 있어 호엔촐레른 왕가보다 한 수 위였다. 그러나 히틀러는 사회주의를 반(反)볼


셰비즘과 결합시키려 했고, 라틴계 인종이 튜턴족(게르만인)보다 열등한 민족이라고 우기면서 유태인을 유태인이


라는 이유로 전멸 시키고 순수 독일 혈통이 세계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부적절한 결론을 이끌어내려 했다. 순수 독


일인이라니,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그러나 나폴레옹, 비스마르크, 카이저 빌헬름, 무솔리니, 히틀러 등은 현실을 제대로 인식했다. 아이들을 장악해서


나무가 자랐으면 하는 방향 대로어린 묘목을 구부려 놓지 못한다면 어떤 정부체제도 오래 유지될 수 없다. 통치자는


선택된 꽃을 키워야 할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해서 동산에서 잡초를 솎아내고 무자비하게 해충을 박멸해야만 한다.


무엇이 꽃이고 잡초이며 해충인가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통치자 손에 달렸다. 정직한 학교가 없다면 정직한 정부


는 존재할 수 없다. 부정직한 정부 아래에서 정직한 학교가 허용될 리 없기 때문이다. 정직한 교육은 전제정


치와 특권을 위협한다. 그래서 대중이 무지한 덕분에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자본주의체제나 성직자의 권위를 지키고


있는 교회, 기득권을 고수하는 것이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특권층, 대중에게 왕권옹호와 영웅숭배를 주입해야 하는


야심 찬 정복자와 독재자 등은 지배세력에 대한 일반대중의 믿음을 유지하기 위해 무지와 교육을 두루 사용한다. 오


늘날 그러한 타락은 보편적인 현상이다. 자본주의 하에서 민주적인 교육은 용인될 수 없다. 민주적인 교육은 필연적


으로 공산주의에 이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공산주의에 대항해서 자본주의 원칙을 체계적으로


선전하고 공산주의 선생들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아야 한다.결국 우리 모두는 맨체스터 학파로 전향하게 되고, 사적인


이윤추구나 국부와 관련된 사안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에 대해 비용을 치르고라도 근접해야 할 사회적 위험으로 취급할


뿐만 아니라, 정부를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려 하고, 정부권력은 아예 망가뜨려야 할 악으로 여긴다. 혁명을 치르거나 국


왕을 시해해서라도 실질적 권력을 민간자본과 금융으로 이전시키려 한다. 결국 무장해제된 왕족이 금권 세력의 꼭두각


시가 되거나 사유재산의 수호자로 앞장서게 될 것이다. 이 모든 선전은 교육의 탈을 쓸 수밖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을


계몽하고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세워진 학교는 수업료 장벽으로 프롤레타리아의 접근을 차단했고, 봉건적 분위기를 견


지했다. 한 술 더 떠서 봉건제의 모든 의무는 벗어 던지고 특권만 고수하고 있다. 한마디로 금권정치적 상황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마침내 교육 현실은 정신적이고 도덕적안 혼란에 빠져 버렸다.


이모든 상황이 자본주의적 관점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전문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자본


주의는 결코 발전할 수 없을 것이다.자본주의의 회계사가 정치적으로 멍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회계사는 2 더하기 2는


5가 아니라 4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목수는 12피트가 12인치보다 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하늘의 별들이 땅으로 떨어진다고 배웠더라도 말이다.


각 분야에서 명성이 자자한 전문가들인데도, 정치적-종교적 혼란에 빠진 나머지 공직을 맡기에 부적합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용납 할 수없는 모든 대상에 공산주의나 공산주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유산계급이 누리는 사치


보다 인류의 복지를 우선시하는 모든 제안을 나쁜 것으로 만든다. 그들의 아버지 세대가 헤겔과 틴들과 콜렌소 주교에게


종교의 파괴자라는 꼬리표를 붙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레닌과 스탈린을 피에 굶주린 악당이며 밑바닥 인생이라고


부른다. 명예니 특권이니 권위니 하는 것들은 머리도 나쁘고 양말 한짝도 꿰맬 줄 모르는, 부유하고 "연줄 많은"사람들의


수중에 들어간다. 자본가들에게는 전혀 돈이 되지는 않지만 사회적으로 필수불가결한 공익 사업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국가는 이미 절반쯤 공산주의를 구현하고 있다. 그런데도 판단이 흐려진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사악하고 불가능하다고 여


기며 프롤레타리아, 볼셰비키 당원, 독재자, 자유, 민주주의, 법과 질서 같은 단어들은 현실과 무관하게 아무데서나 마구


내뱉는다. 한마디로,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대체 알지 못한다.


이쯤에서 나는 그들이 전부 자기 목적을 위해 고의적으로 교활한 거짓말을 하는 위선자나 사기꾼이 아니라는 점을 다시


상기시켜야겠다. 그들 대부분은 상당히 제대로 된 사람들인데, 단지 일상생활 주변에서 듣거나 날마다 신문에서 본 잡소


들을 의미도 모르고 앵무새 처럼 따라 하는 것이다.






교육의 정치적 타락이 사실상 대부분의 사회악을 초래하는 것을 지켜 보면서도, 인간 본성에 대해서는 절망하지 않을 수


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교육의 정치적 타락을 인식하고 막아야 한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는 "저들을 용서해 주


십시요.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지만, 그 유명한 발언이 십자가형에 대한 대책은 아니었다.


유태인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든 모르든, 어쨌거나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유태인들의 종교적 편협함


에 동조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버려두는 대신, 그러한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하는 것이 로마 통치자의


임무다. 그러나 막고 금지하는 것이 정부의 유일무이한 임무는 아니다. 정부는 교육과 입법을 통해, 특히 교육을 통해 인간


인간 사회를 확립하고 유지시켜야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사람들이 금융과 지대한 보험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 세가지를 국유화하라고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토지와


자본의 국유화를 요구할 것이며, 더 이상 지대나 웃돈을 지불하거나 민간독점업자에게 이자를 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안전


을 생각해서 정부가 보증하지 않는 민간은행에는 계좌를 개설하지도 않을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 정부를 지배하고 움직이는


사사로운 "기득권" 세력이 그와 같은 사실을 깨닫는다면, 금융과 지대와 보험에 대해 설명하는 교사들을 해고할 것이다. 그


자리에는, 사유재산과 수의계약의 신성함을 주장하고, 금전 문제에 대해서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할 자유가 우리의 고귀한


생득권이라고 설파하면서 다른 모든 자본주의 유토피아, 허구적인 자본주의 낙원에 대한 신조와 슬로건을 주워섬기는 사람을


데려다 앉힐 것이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것에 반대하여 예전 휘그당 식으로 극성스럽게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시간 낭비다. 어떤 정부도


신조나 강령체계 없이 작동할 수 없고, 아이들을 입맛에 맞게 개조하고 다른 이념을 박해하는 것을 멈추지 못한다. 오직 나치


와 파시스트와 볼셰비키만 그렇게 하고 영국인들은 결코 그런 행동을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리석은 착각이다.


러시아와 이탈리아 혹은 독일의 법과 마찬가지로, 영국법도 정통성에 기반하고 있다. 법은 언제나 정통성에 기반하고 있다. 법


은 언제나 정통성에 기반해야 하며, 정통성에 입각하여 강제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정통성이 자본주의자의 정통성과 다르


다 할지라도, 학교에서 주입되고 법에서 강제되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의 자본주의 정통성이 이튼에서 주입되고


올드 베일리(런던중앙형사법원)에서 강제되는 것처럼 말이다. 프롤레타리아의 법률은 정부의 개입을 줄이라는 휘그당의 기조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제가 수립되면, 우리네 금권주의자들처럼 의석과 작위와 귀족신분을 놓고 거래를 벌이는 시민들은


가차없이 처단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행동의 모든 분야에 정통성이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도덕규범이 불확실하고 가변적인 '황무지'가 있기 마련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우리는 십계명을 신의 법으로 받아들인다. 신앙을 받아들이고 견진성사까지 마친 뒤에 일탈을 하는 사람은


문법에 의해 큰벌을 받게 되어 있다. 그런 모든 회화와 조각, 인형과 테디베어 그리고 노아의 방주는 두 번째 계명을 사뿐히 무시


한다. 우리는 전쟁중에 살인행위를 애국적인 것으로 만들었고, 프루동이 부동산 소유가 절도나 다름없다는 것을 논리적으로 입증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동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현실적인 결론을 내리자면, 우리는 도덕원칙을 가르치고 강제해야만 하고 모든 아이들이 곱셈이나 환산법처럼 도덕원


칙을 배우게 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도덕원칙에 대해서 언제나 논의의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악마의 대변인"이 우리


법의 정신과 타당성에 대해 언제라도 선의의 비판을 가할수 있도록 허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해당 법률을 폐지


하기 전 까지는 법 집행에 대한 저항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이 올바른 학문적 태도다. 그러나 법을 논의할 기회가 많지 않고, 말도


안되는 이유로 법조문의 폐지나 개정을 바라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러므로 법을 고칠 유일한 방법은 아주 많은 사람이 법을 어겨서


사법을 만드는 것뿐이다. 그럴 경우 법은 스스로 폐기될 것이고, 정부는 정식으로 폐지 절차를 밟을 것이다.


이렇게 당혹스러운 상황에서 최선의 교육은 아이들에게 이해할 능력이 생기자마자 법과 도덕규범은 영원한 것이 아니


면 우리의 지적 능력이 진화함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법과 규범은 문명화를


위해 꼭 필요한 수단이며 문명사회의 암묵적 약속을 구성하는 필요불가결한 요소로서, 법과 규범이 없다면 사회생활 자


체가 불가능하다는 점도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


제도가 변화할 때 단지 과거에 대한 반발심에서 상황을 살피지도 않고 아기를 무턱대고 욕조에서 끄집어내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


다. 자본가가 지배했던 제정러시아의 폭정과 높은 문맹률은 과격한 반발을 야기했다. 러시아는 1917년 혁명으로 정권이 교체되면


서 극단적인 정책을 폈다. 모든 이에게 공공비용으로 교육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학교의 권위와 규율은 반역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처음에는 중산층의 자유분방한 생활방식을 따라 하는 것이 마치 프롤레타리아 해방인 것처럼 받아들여져서 한


참 유행했다. 지금도 마땅히 그런 것처럼, 아이에게 상해를 가하는 교수법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러나 소비에트 정부도 공통된


교육방침을 절실하게 필요로 했으며, 아이들이 마르크스에 대해 종교적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그래서 소비에트


정부는 러시아 꼬마들을 철저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만들고자 했다. 이튼이 모든 영국소년을 완벽한 라틴어 시인, 신학자, 고등


수학자로 만들려고 광적인 노력을 기울인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처럼 비인간적인 과정이 이튼에서는 그나마 비용 때문에 재


벌과 전문직과 귀족층에만 국한되었으나, 러시아에서는 전 인구를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따라서 얼마 후에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


어난 것은 놀랄일도 아니다. 러시아의 학교는 수년에 걸쳐 교과과정을 재정비했고, 수학능력을 입증한 사람들에게 국비로 소위 중


등교육을 제공했지만  전문적인 학문연구에 대해서는 그 값어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비용을 대게 만들었다. 미술과 공예를 배워야


할 아이들에게 라틴어 작시법이나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가르치는 것은 쓸데없고 심지어 해로운 일이다. 수학과 역사와 언어는 열


중해서 배울 수 있지만 연필 깍는 재주나 신발끈 묶는 솜씨가 형편없는 학생에게 무역이나 수공예를 가르치는 것과 같다. 모든 사


람이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육이론가들도 형편없지만, 그와 정반대 입장에 서있는 "실리적인" 사람들의 견해도 해롭


다. 실리적인 사람들은 보통사람들이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직업과 상거래에 필요한 기술만 배워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그


러한 교육으로 효율적인 로봇을 생산할 수 있을 지는 모르나, 시민을 길러내지는 못한다.


그러나 어찌되었건,모든 사람이 모든 것을 배워야 한다는 견해는 주목할 만하다. 우리는 능력과 함께 취향을 고려해야 한다.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것 외에 다른것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야만안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이 강력한 지적 취향을 가지


고 있지만 창조적인 지적 능력은 전무하다. 그들은 손에 넣을 수 있는 모든 철학 논문을 닥치는 대로 읽어 치우지만 단 한편,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실질적으로 강력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수많은 군중이 풋볼 시합이나 격투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


들도 있다. 수많은 군중이 풋볼 시합이나 격투기를 관람하기 위해 입장권을 사지만, 그들은 공 한 번 차보거나 권투 글러브 한 번 껴


본 일 없는 사람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악기 하나 다룰 줄 모르고 화음을 맞춰 노래 부를 줄도 모르지만 음악을 들으며 기쁨을 느


낀다. 그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예술과 스포츠에 대해 필요한 모든 것을 안다. 하지만 가장 유명한 연주자나 선수는 어떻게 연주하고


경기하는지를 제외 하고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나는 언젠가 대중 모임에서 연설을 했다. 그때 나 말고도 위대한 영국 작곡가가


연사로 왔다. "그가 버나드 쇼는 나보다 음악에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자 관중들이 놀랐다. 어떤 젊은 음악가


가 화성학과 대위법에 대해 묻자 그는 그런 것들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는 극적인 대사 한 줄 쓸 수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희곡


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내 희곡을 보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세계의 극문학에 대해 나보다 열 배는 더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취향을 가진 수백만의 관중, 청중, 감식가, 비평가, 애호가를 길러내야 한다. 한마디로, 타고난 재능을 가진 한


줌의 프로페셔널을 길러내는 한편 수많은 아마추어도 양성해야 한다.

 


그렇다면 , 최소한의 초등교육이 있는 것처럼 최소한의 미학적 교육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귀가 들리지 않는 아이에게 음악을 가르


치는 것이나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것은 시간낭비라고 치자. 그렇다 하더라도 과연 우리가 어느정도 까지, 들


을 수 있는 모든 아이들을 잠재적인 헨델로 취급하고 볼 수 있는 모든 아이들을 잠재적인 라파엘로 대우하고 말하고 쓸 줄 아는 모


든 아이들을 잠재적인 호메로스나 셰익스피어로 여겨야 할까? 그러한 천재들은 몇 세대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데 말이다. "모든 아


이에게서 천재적인 가능성을 찾을 생각은 전혀 없다." 고 대꾸하고 싶다. 그러나 천재가 나오기만 하면 그 가치는 엄청날 뿐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지속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누구에게나 창조적인 명성을 얻을 기회는 제공 되어야 한다. 가난, 무지, 고된 일, 배고


픔, 너절함은 재능을 짖밟고 천재성을 가로막는다. 인구의 90퍼센트가 프롤레타리아인 곳에서는 재능이 묻히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오웬 메레디스"는 "천재성은 인류의 주인이다. 천재성은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고, 재능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고 선


언 했다. 물론, 노예와 농노, 무산계급의 처지에도 불구하고, 고대 그리스에서는 피디아스와 프락시텔레스,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


레스, 아리스토파네스와 유리피데스가 나왔다. 이탈리아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 티치아노와 틴토레토가 나왔다. 영국에는


셰익스피어가, 독일에서는 괴테가, 노르웨이는 입센이 있고, 아일랜드에서는 바로 나라는 놀라운 사람이 나왔다. 음악을 천상의 경


지로 끌어올린 위대한 작곡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일자무식의 가난뱅이 출신은 아니었다. 가난의 저주


를 없애면, 천재성이 번창할 가능성은 열배로 늘어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갑남을녀가 천재가 되도록 교육시키겠다는 생각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생각이다. 공


평한 출발선이 주어지면 천재성은 스스로 드러날 것이며, 천재성이 발현되기 시작하면 학교당국은 쓸데없이 간섭할 필요가 없다.

 

베토벤이나 미켈란젤로나 셰익스피어와 같은 천재들에게는 오히려 교육이 끼어들 여지가 없지만, 보통사람들은 반드시 음악 미술


문학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국민소득이 공평하게 분배된다 하더라도, 신체 건강한 모든 성인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평생을


일만 해야 했던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인간의 노동력을 대신할 기계가 있으며, 공기에서 질소를 추출하고 물에서 산소를


추출하며 바람과 파도와 조수간만의 차에서 에너지를 얻는 방법을 알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일주일에 닷새는 반일


만 일하고 이틀은 온전히 쉬면서 보다 편안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지각 있는 정부 조직이다. 지금 까지는 우리들 대부분이 먹


고 자는 시간을 빼고는 늘 일만 해야 했다. 그러나 자원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분배될 수 있다. 인구의 90퍼센트가 여가 시간을 전


혀 갖지 못한 채 100퍼센트의 노동을 전담하면, 나머지 10퍼센트의 인구가 가용 여가의 100퍼센트를 독식하게 될것이다.


그러나 미학적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누리는 여가는 재앙이나 다름없다. 무식하고 교양머리 없는 사람들이 엄청난


불로소득을 가지고 무엇을 하겠는가? 먹고, 마시고, 마약하고, 섹스하고, 싸움질하고, 사냥하고, 살인하고, 도박하고,


화려한 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권력을 휘두르고, 복종을 강요하고, 스스로를 추앙하는 것 외에는 다른 즐거움을 전혀


알지 못한다. 셸리를 추종하는 저명한 인도주의자이자 이튼 교사였던 고 헹리 솔트는 자서전에 <야만인들 사이에서 보낸 70년>


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물론 그가 붙인 제목은 과장 되었다. 그러나 이목을 끌기 위해서는 어떤 말이든 다소 과장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유한 계층이 벌집


에 사는 게으름뱅이 수벌이라고는 해도, 그들 역시 살아있는 인간이다. 그러니까 그들에게도 주변환경을 장악하려는 욕구와 인간


의 본성을 알고자 하는 불가결한 충동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재미로 그러는 것이지 다른 외부 동기가 없다. 결국 그들의 알려


하는 충동은 차츰 지루하고 싫증나는 것으로 바뀌고 용두사미로 끝나고 만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 정치인은 솔트의 평가에 따라 행


동 해야 한다. 여가를 독점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 완전한 야만인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한 계층은 음악공연장과


아마추어 연극무대와 문학전집을 가지고 있으며 스포츠 경기장과 정치 무대도 확보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그들은 지


성을 혐오하고, 예술의 섬세한 가치를 보지 못한 채 단지 예술은 무기력하다고 경멸하며, 자기 아이들의 얼굴에 사슴피를 발라 주면


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냥의 세계로 끌고 간다. 그들은 공화국이 아니라 제국의 편이며, 평화가 아니라 전쟁을 지지하고, 단조


로운 행복보다 세상을 들끓게 하는 재난을 원하고, 평등이 아니라 특권에 찬성한다. 한마디로 문명을 배척하고 야만 상태를 원하는


것이다. 게다가 노동자들은 휴일이나 일과 후에 짬이 나면 더욱 야만스럽게 유한 계층을 따라 한다. 미학적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너


절한 지역에서 추악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제는 '심미가'라는 단어가 조롱과 경멸이 섞인 말이 되었다. 심미가라는 말을 사용


하는 사람도 거의 없을 뿐더러 그 단어를 아는 사람조차 거의 없을 정도다. 그러니 '사람들이 심미가가 아니라면, 여가가 나라를 망


칠 것' 이라는 터무니없고 논할 가치가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생각은 논리적으로 타당하며 몹시 중요한 것


이기에 나중에 과학이야기를 하면서 공중보건을 다룰 때 더욱 심도 있게 고찰하도록 하겠다.




풍부한 불로소득을 누리는 삶이 무조건 최선이라고 착각하는 통치자 아래서든, 통치자가 알려주려고 하지 않는 것이나 통치자 스스


로 알지 못하는 것들을 절대로 배울 수가 없고 따라서 사람들은 무지한 상태로 남는다. 그런데 사람들의 무지가 재벌이든 프롤레타


리아든 어느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는, 진짜 바보 같은 경우가 있다. 우리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옷을 입고 단추를 채우


는 법과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그러나 스스로 먹고사는 법은 결코 배우지 못한다. 다녀야 할 모든 학교를 마치고


학위까지 취득한 성인들도 고기를 먹지 않고 술을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어렸을 때 제과점에서 사탕을 사


서 입에 넣었던 것처럼 아무런 의심 없이 약국에 가서 가장 위험한 알약을 사서 삼킨다. 그들에게 이 약을 처방 한 것은 의사들이다.


의사들은 마치 생선, 소고기, 닭고기, 와인, 샴페인젤리를 처방하듯 부주의하게 위험천만한 약을 처방한다. 예전에 나는 의사들의


모임에서 고기를 먹지 않으면 굶어죽을 것이라는 경고를 들었다. 그때로부터 거의 50년이 지났다. 그런데 마치 그 사이에 나를 포


함하여 모든 채식주의자가 굶어죽기라고 한 것처럼 의사들은 여전히 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저명한 내과의사들의 심포지엄에


서 증류주든 발효주든 간에 알코올이 인간의 식탁에서 필수불가결한 요소라고 엄숙하게 결론을 내렸던 것도 기억난다. 성에 대한


지식은 음식에 대해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 청소년들은 성에 관한 생리학적 측면을 배우지 않을 뿐만 아니라, 취


향과 능력이 달라서 서로 양립할 수 없고 평생은커녕 단 일주일도 함께 지낼 수 없는 사람들이 성적으로 가장 강력하게 이끌릴 수


도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주의를 받지도 않는다. 그런 사람들끼리 결혼하면 안 된다. 설령 자연의 법칙에 따라 우생학적으로 대


단히 훌륭한 자식이 태어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에 공공의 관점에서 그들의 결합이 몹시 바람직하다 하더라도,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성병의 위험에 대해서도 경고 하지 않는다. 청소년들은 병에 걸리고 나서야 "왜 나에게 알려주지 않았어요?"라고  해묵


은 항의를 할 뿐 이다.


처음에는 청소년들이 비도덕적인 결정을 내릴까 우려되어 성에 관한 사실들을 은폐한다. 그러나 은폐할 이유가 사라져도 성 지식은


계속해서 금기로 남을 것이다. 성 지식을 알려주지 않고 무조건 금기시하면, 결국 금기에 저항하는 반란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언


어를 발명하기 전부터 존재했던 원시충동들은 어지간해서 말로 다 표현되지 않으며 그저 말없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것이 과학적 사


실이다. 언어의 연금술사인 셸리는 <에피사이키시온>에서 그 형언할 수 없는 원시충동을 말로 표현하기 위해 엄청나게 공을 들였


다. 그러나 그 결과 자연사와 전혀 상관없는 무의미한 광시곡이 탄생하고 말았다.


아이들은 허구가 아니라 사실을 배워야만 한다고 강력히 요구하는 벽창호들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이 상상 속에서 지내도록 하면


서 현실은 조심스럽게 감춰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다. 진실은 진실을 소화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하고, 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개인에 따라 다를 뿐 아니라 연령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는 것을 정치인은(그가 경험에서 배울 수 있는 사람이라면) 곧 알


게 될 것이다. 또한 아이들의 눈 높이에 맞게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되면, 아기의 출생에 관해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등 황새


가 물어다 줬다는 둥 하느 꾸며낸 이야기들은 바로 폐기 될 것이다.


학교에 대해서는 다른 글에서도 여러번, 특히 <어울리지 않는 결혼>과 <상심의 집> 서문에서 언급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까지 되


풀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고문도구와 집행인을 완벽하게 갖춘 감옥이었다. 어른들이


누리는 보통의 일상이 감옥이나 고문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아이들의 평범한 일상도 감옥이나 고문과는 완전히 분리되어야 한다.


다만, 때가 되면 다음 연령집단으로 넘어가야 한다느 사실을 알아야 할 것들이 있다는 강력한 집단견해를 심어줘야 한다. 아이들


세계에도 분명 존재하는 여론은 너무나 전제적인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그냥 내버려두기 보다는 제지할 필요가 있다. 배움에는 상


장이나 메달이 아니라 특권과 자유, 지위와 수입이 따라와야 한다. 오직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만 아이들은 시민으로 교육될 수 있


다. 경쟁시험은 폐지 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경쟁자들이 서로의 무지와 실패에대해 관심을 갖게 만들고, 성공의 개념을


다른 동료를 넘어뜨리는 것과 연관 짓게 만들기 때문이다. 경쟁은 팀과 팀 사이에서 벌어져야 한다. 이렇게 하면 팀 구


성원들이 지식을 공유하고 서로 돕도록 만들 수 있다.


나는 학습동기를 부여하는 것에 수입을 포함 시켯다. 돈을 벌고, 자기가 벌어들인 돈으로 필요한 것을 사는 습관을 일찍부터 들여야


한다. 아이들은 일정한 용돈을 받아야 한다. 벌어들인 소득으로 자기 자신을 부양하는 연습을 해보지 않고 세상에 던져지게 해서는


안 된다. 아이들은 권리와 법령으로 조직화된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 애완동물이나 솔거노비처럼 키워지면 안 되는 것이다. 어른


들과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경찰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선천적인 멍청이나 구제불능인 범죄자들은 제거되어야 한다. 아이들은 모두


경찰을 존중해야 하고, 문명화된 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방식을 습득하지 못하면 아예 살 수가 없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부모나 선생을 경찰관이나 판사나 사형집행인처럼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된다. 가정, 가족 그리고 학교는 빈민수용시설이나


감옥이 아니다. 아이들은 보다 풍요로운 삶을 위해 교육을 받는 것이지, 종신징역형을 위한 견습생으로 학교에 다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유년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나는 올해로 미수(未壽,88세)에 접어들엇지만, 내가 가진 미약한 능력으로도 아직 배워야


할 것 들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