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1. 25. 21:57

배수아 독학자 발췌리뷰 펌

.... 문제는, 어떤 일에서든지 혼자가 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하며 그럴듯한 명분을 가진 깃발 아래 모이고 싶어하는 군중성, 그리고 그 속성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정치적 성향을 가진 소수의 견해에 S가 대치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적이고, 순숫하고, 전투적인 것만큼 또한 그 이상으로 군중의 맹종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맹종 중의 하나는 바로 강한 개성에 대한 사무치는 미움과 질투이다. S가 수업에 들어가 점수를 얻어서 학점으로 그들을 누르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해도, 그들이 만일 진심으로 학점이나 그것을 통한 개인의 영리보다는 국가의 민주화를 더욱 사랑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왜 그렇게 신경질적이 되고 증오에 불타며 화를 내어야 하는가? 각자 신념에 따라 하는 행동들인데 말이다. S가 거역한 것은 젊음의 도덕이나 새로운 정치에 대한 비전도 뭣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군중의 물결 같은 질서였을 뿐이다. 한 명이라도 수업에 들어가면, 다른 이들은 불이익을 받는다! 그들은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키되, 아니 그러는 것처럼 보여야 하되 어떤 불이익도 받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는 앞서의 이념적인 명분보다도 더욱 선명하게,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그들 모두가 강렬하게 합의하고 있기 때문에, 배반자가 생기는 것을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면서 강의실 앞을 지켰다. 그러나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은 상대평가로 나타날 자신들의 성적표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순수한 정치적 신념이 여러 개일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지금 이 시대에 고귀한 선택이 그들이 주장하는 바로 그것이 아닐 수도 있는가! 어떻게 정의가 조각조각 나누어질 수 있는가! 그런 산발적이고 개인적인 고집이 이 세대에 정의를 세우는 데 무슨 도움이 된단 말인가! 부도덕한 존재는 해로운 것이고 해로운 것이 바로 부도덕한 존재 그 자체이다! 그리고 더 나가서, 어떻게 감히 파렴치하게 직접투표라는 민주적 절차를 거진 우리들 다수에게 무모하게 정면으로 대항할 수 있는가! 어찌 그토록 치떨리게 오만할 수 있는가! 그러고도 어찌 감히 그토록 태연자약할 수 있는가! 차라리 냉담한 소수가 되어 구석에서 침묵을 지키거나 겁에 질린 채 말없이 우리 뒤를 따라오라! 그러면 최소한 자비로운 용서를 받을 수 있을 테니. 그들의 신념에 가득 찬 강인한 표정은 그런 전체주의의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이 적으로부터 너무나 충분히 배운, 바로 그것 말이다." (pp.26-28)

 


 

 


 

..... 나는 세상의 모든 책에 대해서 그에게 편지를 쓰게 되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가 젊음에 대해서 암시한 대로, 세상의 모든 일을 경험한 다음, 세상의 모든 장소에서 그에게 편지를 쓰리라 생각했다. 이 여름의 여행도 오직 그를 위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앞으로도 그를 위해서 얼마든지 여행을 떠날 것이고, 그 여행지에서 그에게 편지를 쓸 것이며, 나는 그런 여행과 편지 쓰기를 오직 그를 위한 '저녁 식사 전의 가벼운 숲속 산책'이라고 부르리라..... (p.76)


 

 


 

..... 얼마 전부터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대도시를 떠나서 새로운 장소에서 삶을 완전히 다시 시작하는 것을 꿈꾸게 되었다. 나는 마음속에 그 새로운 도시를 그리고 또 그렸다. 나는 현대적인 교통수단이 없는 도시를 꿈꾼다...... 거의 어느 곳이든지 걸어가야 하므로 대도시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너무나 멀리 있게 된다. 상상력과 영감이 마음속에서 이글거리며 불타오른다. 나는 책을 펼쳐든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밤에 책을 읽는다. 오락거리가 없으며 대중적인 문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동물을 죽이지 않고 과일과 야채를 주로 먹으며 강물 위로는 길다란 모양을 한 배가 소리도 없이 미끄러진다. 책을 많이 읽을 수 있도록, 그곳의 밤은 길고도 길며 달빛이 사람들의 고요한 이마로 찾아든다. 사람들의 대화는 마치 라틴어 기도문과 같이 엄숙한 문법을 준수한다. 모든 사람은 오직 생계를 위하여 필요한 만큼만 일하며 필요한 것보다 많이 가지려 하는 사람도 없고 그럴 수도 없다. 화려한 옷이나 번쩍이는 물건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종교와 신성을 존중하기는 하나, 아무도 신자가 되지는 않는다. 문학과 예술을 너무나 사랑하나 아무도 그것으로 이름을 얻기를 욕망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지루한 삶에 지친 사람들은 여자와 함께 강물 위의 배를 타고 떠나고 말수가 없는 새로운 사람들이 이주해온다. 도시는 전체가 그대로 내가 전 일생 동안 먼 바닷가 깊은 동굴에서 바라보고만 있었던,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영혼을 깊숙이 빨아들이는 백색의 대학과 같다. 나는 그곳에서 새로운 이름을 받는다. 그 이름은 책 속에서 나를 향해 스스로 걸어 나왔다. 그 책은 내 상상과 사유의 결과물이며 나를 영원한 그 도시의 시민으로 기록한다. 나는 배에서 내려 안개 속에서 희미한 빛의 섬으로 떠 있는 도시의 광장을 향해 똑바로 걸어간다. 나는 후회하지 않고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그리하여 내가 떠나온 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다시 볼 수는 없으리라............ (pp.129-130)


 


....... 우선 일자리를 찾을 것이다. 단 일자리는 반드시 육체노동이거나 반복노동 등의 단순한 일이 될 것이다...(중략)... 그렇게 직업을 준비하면서 - 이것이 나의 실질적인 일차 목표인데 - 일 년이나 일 년 반 동안 두 가지나 가능하면 세 가지의 외국어를 책을 읽을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올릴 것이다. 물론 공부는 주말과 밤에 한다. 나는 생계를 위한 노동에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짓은 하지 않겠지만, 노동이 삶의 수단을 제공해준다는 사실은 분명히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또한 노동에의 집중과 성실이 '읽는사람'으로서의 나를 연마하는 훈련이 됨을 인정하기로 했다. 노동은 삶과 함께 지속될 것이고 삶과 동시에 종말을 맞을 것이다. 나의 독서가 어떤 가시적인 성취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닌 오직 그 자체로서 목적인 것처럼 노동 또한 생계라는 원래 이외의 목적을 갖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느냐에 대해서 신경쓰지도 않을 것이고 무슨 일을 하지 못하느냐에 대해서 증오하거나 질투를 품지도 않을 것이다. 최대한 많은 정신적 에너지를 오직 공부에 쏟는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소박하고 낮은 수준의 경제와 단순육체 노동을 선택할 것이다.
그리하여 마흔 살까지는 생계를 위해서 필요한 돈을 버는 이외의 시간은 오직 혼자서 책을 읽으며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한눈팔지 않고 공부할 것이다. 마흔 살까지 나는 오직 공부에만 미칠 것이다. 마흔 살까지의 내 삶은 언제나 내가 꿈꾸던 교통수단이 없는 도시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구술언어가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으리라. 스무 살, 이제 그곳으로 나는 배를 타고 떠난다. 저녁의 광장에 희미한 불이 켜지는 시간이면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책을 펼칠 것이다. 신문이나 방송도 멀리 할 것이다. 사람을 만나거나 직접 대화하는 것도 피할 것이다. 한국에서 살 수 없는 읽고 싶은 책들은 외국의 출판사에서 직접 주문하고 그렇게 읽은 모든 책들에 대해서 독후감을 쓸 것이다. 그것들은 마흔 살까지 내 사적인 일지를 대신하게 되리라. 나는 술도 마시지 않고 영화관에 가거나 바닷가에 놀러가지도 않을 것이다. 결혼이나 사랑도 필요하지 않으며 어느 순간에 타인들을 상대로 뭔가 아는 척하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해지더라도 자신을 엄하게 꾸짖을 것이다. 내가 형편없이 미숙하고 내 목소리를 내기에는 아직도 한참 부족한 존재임을 잊지 않기 위해서, 언제나 내 교만을 압도해버리는, 내가 쉽게 소화할 수 있는 이상의 것들을 찾아서 읽으리라. 그리하여 마흔 살까지는 어떤 영감을 받더라도, 독후감 이상의 것은 쓰지 않겠다. 나를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어떤 모습인지 나는 모른다. 그러나 두려워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간은 더디게 흐르겠지만 초조해하지도 않으리라. 분명히 고독하고 틀림없이 두렵기도 하겠지만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러다 이윽고 마흔 살이 되면, 그 때 나는 스스로 만든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그때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자유롭고 선명한 존재가 되어 있을 것임을, 나는 의심하지 않겠다......... (pp.170-173)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할 것이지만 나는 어쩐지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비판적인 생각이 드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정치적 진보에 투입되는 열정에 비해 사회 자체의 진보에 대해서는 놀랄 만큼 관심이 없었으며, 혹은 정치적 진보가 그대로 사회의 진보라고 믿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누구를 탄핵해야 하는 부담도 없고 이익을 나누어 가지기 위해 머리 터지게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고 당장 오늘 저녁 내 밥상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건만, 혹은 오히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아무도 진보된 정치에 어울릴 만한, 그것을 포용할 만한 혹은 그것에 포용될 만한 진보된 사회에 대해서는 관심을 전혀 기울이지 않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진보된 개인과 문화를 위해서, 그들을 위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진보된 정치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은 정반대인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인 자유 이외의 모든 지적인 자유, 정치적인 의미 이외의 사상의 자유, 예술의 자유, 그리고 가장 잔인하고 억압적인 관습으로부터의 자유, 해머처럼 가차 없이 머리 위로 떨어지는 다수의 결정으로부터의 자유, 군중으로부터의 자유, 잔인한 본성으로부터의 자유, 무기와 육식으로부터의 자유, 폐쇄적인 성 정체성과 전통적 가족으로부터의 자유, 그런 것들을 원하는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다....... (pp.125-126)


 


........ 나는 내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오래 전부터 그것은 상실이라고 불렸다. 그 이름의 권능에 비한다면 지금 내 가슴을 꿰뚫고 조금씩 살과 내장을 파고들고 있는 창날의 고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리라. 그러나 이 고통이 의미하는 것은 아픔이나 열등감 따위가 아니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자존심의 훼손 따위도 아니다. 승부는 한낱 상관없는 것이고, 오직 지금 당장 눈꺼풀 앞에 닥친 결정적인 인사에 대한 공허하고 무기력한 공포가 문제였다. 그러나 나는 어쨌든 견뎌내게 되리라. 정장 차림의 신사들의 의례적인 이별의 인사, 뾰족한 부리의 새들이 춤을 추는 듯한 여인들의 일부러 꾸민 듯이 우아한 작별의 인사, 그리고 조금도 특별하지 않게 고개를 숙이고 좀 당황한 듯이 짧은 악수를 나누고 뒤돌아서 뚜벅뚜벅 걸어 이윽고 멀어져가는, 언제나 마음과는 너무나 별개인, 시민들의 예절에 어울리는, 그런 마지막 인사를.
그는 과격한 정중함, 그토록 목마르게 고대하던 접촉의 첫순간처럼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예리하게 곤두선 신경의 현, 살 속으로 파고드는 집요함의 포옹, 들이민 칼끝의 입맞춤, 불결이란 단어가 연상시키는 추악한 상상 속으로 자신을 구겨넣으며 흉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찡그리는 표정으로 '제발 날 내버려두지 말아!' 하고 반복해서 외치면서 먼저 뒷걸음 쳐 스스로 멀어져간다. 차가운 절교의 편지를 받아달라고 애원하는 애통과 절규를 향해서 나는 그렇게 손을 내밀 수 밖에 없었다. 둔한 쇼크로 마비도니 심장과 축축하고 미지근한 손바닥을 가진 이별이여. 점점 부풀어오르는 젖은 인형처럼 연약한 나를 압도하는 너의 형상, 너의 얼굴. 그러나 뒤늦게 바람을 타고 빠르게 달리는 도둑처럼 모퉁이를 돌아 드디어 너는 보이지 않게 된다. 어두운 구석에서 소리 없이 움트는 시간의 버섯, 멀어져가는 너의 마지막 얼굴에서 피어나는 그림자 버섯이 스무 살의 살갗을 노래한다. 그 노래는 질문이었다. 나의 젊은 아도니스여, 네가 스스로 잃어버린 것, 그것이 무엇이었느냐고......... (pp.1204-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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