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8. 17. 11:48

마라시력설-루쉰

마라시력설

 

옛 근원에 대해 잘 아는 자는 마침내 미래의 샘물과 새 근원을 찾게 될 것이다.

오 내 형제들이여,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고 새로운 샘물이 심연에 솟아오를때가

머지않았도다.- 니체  

 

1

 

누구나 오래된 나라의 문화사를 읽으며 시대를 따라 내려가다 권말에 이르면

 

틀림없이 처량한 느낌이 들 것이다. 그것은 마치 따뜻한 봄날을 벗어나 쓸쓸한 

 

가을에 접어들어 생기를 잃고 앙상한 마른 나뭇가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듯하다.

 

나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지만 아무래도 적막이라 부르는것이 좋겠다.

 

대개후세 사람들에게 남겨놓은 인문 가운데 가장 힘있는 것은 마음의 소리 만 한 것이

 

없다. 옛 사람의 상상력은 자연의 오묘함에 닿아있고 삼라만상과 연결되어 있어,

 

그것을 마음으로 깨달아 그 말할 수 있는 바를 말하게 되면 시가가 된다.

 

그 소리는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의 마음속에 파고들면 함구 하듯이 그렇게 단절

 

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만연되어 그 민족을 돋보이게 한다. 점차 문사가 쇠미해지면

 

민족의 운명도 다하고 뭇사람의 울림이 끊기면 그 영화도 빛을 거둔다.역사를 읽는 사람에게

 

적막한 느낌이 뭉클 일어나면, 이 문명사의 기록도 점차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게 된다.

 

무릇역사의 초기에 영예를 가득 안고 문화의 서광을 열었지만 지금에 이르러 흔적만 남게

 

된 나라는 대개 이와 같다. 가령 우리나라 사람들의 귀에 익숙한 나라를 예로 든다면

 

인도가 가장 적절할 것이다. 인도에는 옛날 네 종류의 베다가 있었는데, 아름답고

 

깊이가 있어서 세계의 위대한 문장이라 일컬어진다. 또한 '마하바라타'와 '라마야나'라는

 

두편의 서사시 역시 지극히 아름답고 오묘하다. 그 후 칼리다사라는 시인이 나와 극작

 

으로써 세상에 이름을 떨쳤고 간혹 서정적인 작품도 지었다. 게르만의 최고 시인 괴테는

 

그것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민족이 힘을  잃게되자 문사 역시 함께

 

영락하여 위대한 소리는 점차 그 국민의 가슴속에서 되살아나지 못하고 마치 망명자처럼

 

이역을 떠돌게 되었다. 다음으로 헤브라이 민족을 예로 들면, 신앙의 가르침과 많이 관련

 

되어 있지만 문장이 매우 심오하고 장엄하여, 종교적 문술은 바로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지금까지도 없어지지 않고 있다. 다만 이스라엘 민족의 경우,

 

예레미야의 노랫소리로만 그친다. 역대왕들은 방탕하여 하느님이 크게 노했고 예루살렘

 

이 마침내 파괴되고 민족의 혀도 침묵하게 되었다. 그들이 다른 나라로 유랑할 때 비록

 

자기 조국을 잊지 않고 자기의 언어와 신앙을 정성스럽게 간직하려고 애를 썼지만 예레미아의

 

'애가(哀歌)'이후로 이어지는 울림의 노랫소리가 없었다. 그 다음으로 이란과 이집트의 경우

 

이들은 모두 두레박줄 끊어지듯 중도에서 무너지고 말았으니, 예전에는 찬란했지만 지금에는

 

쓸쓸하다. 만약 진단이 이 대열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인생의 큰 행복 중에서 이보다 더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영국의 칼라일은 이렇게 말했다. "밝게 빛나는 소리를 얻어

 

마음의 뜻을 마음껏 노래 부르며 살아가는 것은 국민이 가장 먼저 바라는 일이다. 이탈리아는

 

단테를 낳았고 이탈리아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제국 러시아의 차르는 병력과 무기를

 

가지고 있어 정치적으로 넓은 지역을 관할하고 대업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어찌하여 소리가

 

없는가? 내부에 혹시 위대한 것이 있다고는 하나 그 위대하다는 것이 목이 쉰 것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병력과 무기는 부식하지 않을 수 없지만 단테의 노랫소리는 의연하다. 단테를 가진나라는

 

통일되어 있지만 소리의 조짐 없는 러시아 사람은 결국 지리멸렬할 따름이다."

 

니체는 야만인을 싫어하지 않고 그들은 새로운 힘을 가지고 있다고 했으니, 이는 움직일 수 없는

 

확실한 말이다. 대개 문명의 조짐은 진실로 야만 속에서 배태되며, 야만인은 개화되지 못한 상태이지만

 

숨겨진 찬란한 빛이 그 내부에 잠복해 있다. 문명이 꽃이라면 야만은 꽃받침이고 문명이 열매라면 야만은

 

꽃이어서 전진이 여기에 있고 희망도 여기에 있다. 다만 문화가 이미 멈춘 오래된 민족은 그렇지 않다.

 

발전이 멈추자 쇠락이 뒤따르고, 더욱이 오랫동안 옛 선조의 영광에 의지하여 수준이 낮은  주위 나라들 속에서

 

우쭐해하면 무기력한 모습을 하고서도 스스로를 알지 못하고 미련하게 자기만 옳다고 고집하니 마치 죽은

 

바다처럼 가라앉아 있다. 찬란하게 역사의 초기를 차지했다가 마침내 권말에 이르러 모습을 감추게 된 것은 

 

아마 이 때문이 아니겠는가? 러시아가 소리가 없더니 이제 격렬한 소리를 울리고 있다. 러시아는 어린이에 

 

불과하지만 벙어리는 아니며 지하수와 같지만 마른 우물은 아니다. 19세기 전기에 과연 고골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눈물과 슬픔으로써 자기 나라 사람을 진작시키니, 혹자는 마치 영국의 

 

세익스피어와 비슷하다고 했다. 세익스피어는 바로 칼라일이 칭찬하고 숭배했던 사람이다. 세상을 돌아보면 

 

새로운 소리가 다투어 일어나 특수하고 웅장한 언어로써 스스로 그 정신을 진작시키고 그 위대하고 아름다움을 

 

세계에 소개하지 않는 민족이 없다. 만약 깊은 침묵 속에서 움직이지 않는 민족이 있다면 오직 앞에서 예로 든 인도

 

이하의 몇몇 오래된 나라들뿐이다.

 

아아, 오래된 민족의 문학 유산은 장엄하지 않은 것이 없고 숭고하고 위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만 오늘날과 호흡이 

 

통하지 않으니, 옛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에게 어루만지며 읊조리게 하는 것 이외에 달리 무엇을 자손에게 물려

 

주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예전의 그 영광을 혼자 중얼거리면서 지금의 적막을 가리려고 하니, 도리어 새로 일어나는

 

나라만 못하다. 그 나라의 문화는 아직 번성하지는 못했지만 미래에 충분히 존경할만하게 될 것이라는 큰 희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고 문명국이 처량의 말뜻이 들어 있고 풍자의 말뜻이 들어있는

 

것이리라! 중도에 몰락한 귀족의 후예는 집안이 무너졌어도 사람들에게 떠벌리며, 우리 선조의 한창 때는 비할 데

 

없이 지혜롭고 무공이 혁혁하여 대궐 같은 집과 웅장한 누각, 주옥과 견마가 있었으니 존귀함은 범인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배 잡고 웃지 않겠는가? 무릇 국민의 발전을 위해서 옛날을

 

그리워하는 것도 일정한 공로가 있다. 그렇지만 그리워한다는 말의 의미는 거울에 비춰 보듯 분명하다.

 

때로는 전진하고 때로는 되돌아보고, 때로는 광명의 먼 길로 나아가고 때로는 찬란했던 과거를 되새긴다. 그리하여

 

새로운것은 날마다 새로워지고 옛것 역시 죽지 않는다. 만약 이런 까닭을 모르고 멋대로 자만하면서 스스로 즐거워

 

한다면 바로 이때부터 긴긴 밤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 중국의 큰 길거리로 발길을 옮겨보면 틀림없이, 군인들이 

 

시내를 오가는 것을 보고는 입을 크게 벌리며 군가를 지어 인도나 폴란드의 노예근성을 질타 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제멋대로 국가를 짓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대개 오늘날 중국은 자못 과거를 그리워하여 이전의 밝은 

 

빛만 내세우고 특별히 소리를 내지 못하면서 왼쪽 이웃은 이미 노예가 되었고 오른쪽 이웃은 곧 망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망해 가는 나라를 택하여 자기와 비교하여 스스로 훌륭함을 드러내길 바란다. 인도와 폴란드 두 나라와

 

진단 가운데 도대체 어느쪽이 더 열등한가에 대해서는 지금 잠시 말을 접어 두겠다. 만약 찬미의 시편과 국민의

 

소리에 대해 언급할 경우, 천하에 노래하는 자는 비록 많으나 참으로 이런 식으로 노래하는 경우는 보지 못했다.

 

시인은 자취를 감추고 하는 일은 대단히 미약하여 적막이 감정이 갑자기 내습한다. 생각건데, 조국의 진정한 위대함을

 

떨치려면, 먼저 자기를 살피고 또한 남을 알아야 하는바, 두루 비교해야 자각이 생기는 것이다. 자각의 소리가 나타나면

 

그 울림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고, 맑고 밝아서 보통의 울림과는 다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에는

 

입과 혀가 달라붙고 말들이 나오지 않아 침묵의 내습이 이전보다 배가 된다. 정신이 몽롱하게 꿈을 꾸고 있으니 어찌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아 강해지려고 스스로 분발하고 있으나 대단치 않을 뿐만 아니라

 

공연히 한숨만 더할 뿐이다. 따라서 국민정신의 발양은 세계에 대한 넓은 식견과 함께한다고 하겠다.

 

이제 옛일은 언급하지 않기로 하고 달리 다른 나라의 새로운 소리를 탐구해 보자.

 

그 원인은 바로 옛날을 그리워함에서 촉발되었다. 새로운 소리의 차이에 대해 자세히 따질 수는 없지만, 충분히 사람들을

 

진작시킬 만한 힘이 있고 또한 말이 비교적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는 실로 마라시파라 한다. 마라라는 말은 인도에서

 

빌려 온 것으로 하늘의 마귀를 뜻하며, 유럽인들은 이를 사탄이라 불렀고, 사람들은 본래 바이런을 그것으로 지목했다.

 

여기서는 모든 시인들 중에서 대체로 반항의 뜻을 두고 행동에 목적을 두어 세상으로부터 탐탁지 않게 여겨지는 시인들을

 

다 이에 포함시켰다. 이들의 언행과 사유, 유파와 영향을 전할 것이며, 이 시파의 시조인 바이런에서 시작하여 마자르(헝가리)

 

의 문인에서 마칠 것이다. 무릇 이 시인들은 겉 모습은 퍽 다르고 각자 자기 나라의  특색을 부여받아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지만, 그들의 주요한 경향을 총괄하면 하나로 모아진다. 대체로 세상에 순응하는 화락의 소리를 내지 않았고

 

목청껏 한번 소리 지르면 듣는 사람들은 흥분하여 하늘과 싸우고 세속을 거부했으니, 이들의 정신은 후세 사람들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켜 끝없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아직 태어나지 않았거나 해탈한 이후라면  이 시인들의 소리를 

 

듣고 나면 진실로 소리 중에서 가장 웅대하고 위대하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평화를 말하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시인들이 자못 두려울 것이다.

 

 

2

 

평화란 인간 세상에는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평화를 말한다면, 그것은 전쟁이 바야흐로 끝났을 때나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 때에 지나지 않는다. 겉모습은 조용한 것 같지만 암류가 전복하고 있어 일단 때가 되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자연에서 그것을 살펴보면,  산들바람이 숲을 어루만지고 단비가 사물을 적시어 마치 인간 세상에 복을 내려

 

주는 것 같지만, 뜨거운 불길이 땅속에 숨어 있다가 화산으로 바뀌어 일단 폭발하게 되면 만물이 함께 파괴 되는 것이다.

 

비바람이 때때로 일어나는 것은 다만 잠복 현상으로서 영원히 평온할 수 없으니 이는 에덴동산과 같다. 인간의 일

 

역시 그러하여 의식,가정,나라의 다툼은 뚜렷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이미 가리거나 숨길수 없다. 두사람이 같은방에

 

있어도 호흡을 하기에 공기에 대한 다툼이 생기고 폐가 강한 사람이 승리하게 된다. 따라서 생존경쟁은 생명 존재와

 

더불어 시작되었으니 평화라는 이름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다만 인류가 처음 생겨났을 때에는 무력과 용맹으로

 

써 저항하고 투쟁하여 점차 문명으로 나아갔으나, 교회가 고정되고 풍속이 변하여 새로운 나약함에 빠져들면서 전진의

 

험난함을 알아 아예 유순해지려고 한다. 전쟁이 눈앞에 닥치면 또 스스로 피할 수 없음을 알고 이에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상적인 나라를 만들어 낸다. 인간이 이른 적이 없는 곳에 기탁하는 경우도 있고, 헤아릴 수 없는 먼 훗날로 미루는 경우

 

도 있다. 플라톤의 "국가"가 나온 이후 서방의 철학자들 중에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이다. 비록 예로부터 지금까지 평화의 조짐은 전혀 없었지만 그것을 학수고대하면서 하루도 빠짐없이 앙모할 목표를 간절히

 

추구했으니, 요컨대 이 또한 인간 진화의 한 요소가 아닌가? 우리 중국의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유독 서방과 달라 아득히

 

먼 요순시대에 마음을 기울이거나 태고시대로 돌아가 사람과 짐승이 혼재된 세상에서 노닌다. 그들은 그때에는  어떠한 재앙도

 

생기지 않았고 사람들은 본성에 만족할 수 있어서 지금의 세상처럼 추악하고 위험하여 생활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인류의 진화라는 역사적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완전히 배치 되는 일이다. 대개 옛날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떠돌아다녔으니 그 다툼과 노고가 아마 지금보다 더 심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과 비교하여 꼭 덜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오랜 세월이 지나 역사 기록이 남아 있지 않고 땀자국과 피비린내가 모두 민멸되었기에, 추측하여 그때에는

 

지극히 만족스럽고 안락 했으리라 생각할 뿐이다. 가령 누군가를 당시로 돌려보내어 옛 사람들과 그 우환을 함꼐하도록 하면

 

풀이 죽고 실의에 빠져 저 먼 반고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개벽이 되지 않은 세계를 다시 그리워할 것이니, 이 또한 반드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희망도 없고 전진도 없고 노력도 없어 서방의 사상과 비교하면

 

물과 불의 관계와 같다. 자살로써 옛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면 평생토록 더 이상 바라거나 노력할 것이 없어, 사람들을

 

본보기로 삼을 만한 목표로 이끌어도 속수무책으로 크게 한탄이나 하며 정신과 육체가 함께 무너질 따름이다.

 

더욱이 그 주장을 헤아려 보고 또 옛날의 사상가들을 보건대, 결코 오늘날 사람들이 과장해서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화토를

 

낙토로 여기지는 않았다. 심히 나약하여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스스로 알고 오직 세속을 초월하려 했으며, 오래된 나라에

 

넋이 빠져 사람들을 곤충이나 짐승수준으로 떨어뜨려 놓고 자신은 은일해 버렸던 것이다. 사상가들이 이런데도 사회에서는

 

그들을 칭찬하여 한결같이 고상한 인물이라고 하니 이는 스스로 나는 곤충이요 짐승이요 하는것과 같다. 그렇지 않은 경우

 

에는 달리 학설을 내세워 사람들을 모두 태고의 절박함으로 되돌아 가게 했는데, 노자의 무리가 그중에서 가장 뛰어났다.

 

노자가 쓴 5,000자의 글은 그 요점이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데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먼저 스스로 고목의 마음에 이르고 "무위치지"를 확립해야 한다. 무위로써 사회를 교화시키면 세상이

 

태평해진다는 것이다. 이들의 방법은 훌륭하다. 그렇지만 성운이 응결되고 인류가 출현한 이래로 생존경쟁이 나타나지 않은

 

시대와 생물은 없었으며, 진화가 간혹 정지할 수는 있어도 생물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는 없으니 어찌하랴. 만약

 

진실로 인간을 이끌어 점차 금수나 초목 그리고 원시생물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점차 무생물에까지 접근시킬 수 있다면

 

우주는 거대한 한 덩어리가 되고 생물은 이미 사라져 일체가 허무로 변할 것이니, 이는 차라리 지극히 맑은 세계가 아닌가

 

그러나 불행히도 진화는 날아가는 화살과 같아 떨어지지 않으면 멈추지 않고 사물에 부딪히지 않으면 멈추지 않으니

 

거꾸로 날아가 활시위로 되돌아가기를 바라더라도 이는 이치로 보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이 인간 세상이 슬픈 까닭이며 '마라시파' 가 지극히 위대한 이유이다. 인간이 이 힘을 얻으면 왕성해지고 널리 퍼지고

 

향상되어 인간이 이를 수 있는 극점까지 도달할 것이다.

 

중국에서 다스림은 그 이상이 어지럽히지 않는 데 있었지만, 그 의미는 앞의 주장과 달랐다. 사람들이 서로 어지럽거나

 

사람들에게서 어지럽힘을 당하는 것을 제왕들이 크게 금했는데, 그 의도는 자리를 보존하는 데 있었으니 자손 대대로 천만세

 

동안 통치하며 그치지 않으려는 것이 었다. 그래서 천재(Genius)가 나타나면 반드시 전력을 다해 죽인다. 사람들이 나를

 

어지럽히거나 내가 사람들을 어지럽힐 수 있는 것을 백성들이 크게 금했는데, 그 의도는 평안히 생활하는 데 있었으니

 

차라리 몸을 웅크리고 영락할지언정 진취적인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천재가 나타나면 반드시 전력을 다해 죽인다.

 

플라톤은 이상적인 나라를 세우고, 시인은 다스림을 어지럽히므로 마땅히 나라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했다.

 

비록 나라의 좋고 나쁨과 뜻의 높고 낮음에는 차이가 있지만 그 방법은 실로 하나에서 나온 것이다. 대개 시인이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자이다. 보통사람의 마음에도 시가 없을 수 없다. 시인이 시를 짓는다고 해도 시는 시인의

 

전유물이 아니다. 시인이 지은 시를 한번 읽어 보고 마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시인의 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다만 보통 사람은 시가 있어도 말로 나타내지 못하는데,

 

시인이 대신하여 말로 표현한다. 시인이 활을 잡고 한번 퉁기면 마음의 현이 즉시 이에 호응하여 그 소리가 영부에

 

맑게 울려 퍼져 감정이 있는 생물은 모두 아침 해를 바라보듯 고개를 들며, 더욱이 이로 인해 아름답고 강력하고

 

고상하고 분발하게 되어 혼탁한 평화가 이로써 파괴된다. 평화가 파괴되면 인도(人道)가 증진된다. 그렇지만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노예에 이르기까지 이로 인해 이전의 생활이 변하지 않을 수 없으니, 힘을 합쳐 그

 

변화를 막고 옛 상태를 영원히 보존하려는 생각 역시 인지상정일 것이다. 옛 상태가 영속하면 이를 오래된 나라

 

라고 한다.

 

시는 어쨌든 완전히 멸할 수 없는 것인데도 틀을 만들어 그것을 가두어 놓는다. 예를 들어 중국의 시를 보면,

 

순임금은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라 했고 후대의 현자는 이론을 세워 시는 사람의 상정을 묶어두는 것이며

 

"시경" 삼백편의 요지는 '사악함이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무릇 시는 뜻을 말하는 것이라 해놓고

 

어째서 묶어 둔다고 하는가? 억지로 사악함이 없다고 하면 그것은 사람의 뜻(人志)이 아니다. 이는 아마도

 

자유를 채찍이나 고삐 아래에 두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후의 글들은 과연 엎치락뒤치락해도 그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주인을 송축하거나 귀족에게 아첨하는 작품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간혹 벌레나 새 소리에

 

마음이 반응하고 숲이나 샘물에 감정이 동하여 운어(韻語)로 나타내기도 했지만, 역시 대부분은 무형의 감옥에

 

갇혀 천지지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일에 비분강개하고 이전의 성현에

 

대한 감회를 표현한, 있으나 마나 한 작품이 잠시나마 세상에 유행하였다.만약 우물쭈물하며 남녀 간의 사랑을

 

우연히 언급하면 유학자들은 곧바로 입을 모아서 이를 비난한다. 하물며 상속에 지극히 반대하는 말에 대해서는

 

어떠하겠는가? 오직 굴원만이 죽음을 앞두고 머릿속 생각이 파도처럼 일어나 멱라수에 까지 이어지고, 조국을

 

되돌아보고 훌륭한 인재가 없음을 슬퍼하여 애원을 표현하여 기문을 지었다. 망망한 물 앞에서 주저 없이 세속의

 

혼탁함을 원망하여 자신의 뛰어난 재능을 칭송했고, 태고 때로부터 만물의 보잘것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회의하면서 이전 사람들이 감히 말할 수 없었던 것까지 거리낌 없이 말했다. 그러나 그중에 아름답고 슬픈 소리가

 

넘치고 있지만, 반항과 도전은 작품 전체에서 찾아 볼 수 없으니 후세 사람들에 대한 감동은 강하지 않았다.

 

유협은 재능이 뛰어난 자는 그 웅장한 체재를 따랐고, 기교 있는자는 그 아름다운 문사를 구했고,읊조리는 자는

 

작품에 나오는 산천을 음미했고, 초학자는 작품 속의 향초를 주워 모았다고 했다. 모두 겉모습에만 뜻을 두고

 

본질적인 내용에까지 나아가지 못하여 위대한 시인이 죽은 이후 사회는 변함이 없었으니 유협이 말한 네 구절

 

속에는 깊은 슬픔이 담겨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대하고 아름다운 소리가 우리의 귀청을 울리지 못하는 것은

 

역시 오늘날에 처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대체로 시인이 먼저 제창하여도 백성은 현혹되지 않는다.

 

생각건대 문자가 생긴 이래로 지금까지 시인이나 사인들중에서 멋진 시를 지어 그들의 영감을 전하여 우리의 성정을

 

아름답게 하고 우리의 사상을 숭고하게 한 자가 과연 몇이나 되는가? 위아래로 찾아보아도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역시 그들의 잘못이라 할 수 없다. 사람들의 마음에는 실리라는 두 글자가 아로새겨져 있어

 

그것을 얻지 못하면 애쓰고 그것을 얻으면 곧 잠이 든다. 설령 격렬한 울림이 있어도 어찌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겠는가?

 

무릇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 것은 말라죽어서가 아니면 위축되어 있기 때문인데, 하물며 실리에 대한 생각이 가슴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데야 어찌하겠는가. 또한 실리라는 것은 지극히 비열하여 언급할 것이 못 되니, 점차 비겁과 인색,

 

퇴보와 두려움에 이르게 되어 옛사람들의 소박함은 없어지고 말세의 각박함이 남게 되는 것은 필연적인 추세이다.

 

이 역시 옛 철학자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다.

 

 

3

 

순문학의 입장에서 말하면, 모든 예술의 본질은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에게 감정을 일으켜 기쁘게 하는데

 

있다. 문학은 예술의 일종이므로 그 본질역시 당연히 그러하여, 개인이나 국가의 존망과 관계가 없고

 

실리와 멀리 떨어져 있고 이치를 따지는 일도 없다. 따라서 문학의 효용은 지식을 넓히는 데에는 역사책만

 

못하고, 사람을 훈계하는 데에는 격언만 못하고, 부를 쌓는 데에는 공업이나 상업만 못하고, 공명을 떨치는

 

데에는 졸업장만 못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문학이 있으며, 사람들은 이에 거의 만족하는 것 같다.

 

영국인 다우든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뛰어난 예술과 문학이라 하더라도 보고 읽은뒤에 인간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보고 읽는 데에 즐거워 하는 것은 큰 바다를 헤엄치는

 

것과 같아서 망망한 바다를 마주하고 유유히 파도를 타면 수영이 끝난 다음에 몸과 마음 모두에 변화가 생긴다.

 

그런데 저 바다라고 하는 것은 실은 파도가 넘실 거릴 뿐이고 감정이란 전혀없으니 처음부터 교훈이나 격언은

 

한 마디도 우리에게 주지 못한다.그러나 헤엄치는 사람의 원기와 체력은 바로 그로인해 급격히 증대된다."

 

따라서 문학의 인생에 대한 쓰임은 결코 의식,가옥,종교,도덕에 비해 못하지 않다. 대개 인간은 천지지간에

 

있기 때문에, 때로는 자신을 잃어버리고 망연자실하기도 하고, 때로는 생계를 잃고 주색에 빠지기도 하고

 

때로는 현실의 영역에서 활동하기도 하고, 때로는 이상적인 영역에 마음을 두기도 한다. 만일 어느 한쪽에만 

 

그것은 완전하다 할 수없다. 추운 겨울이 영원히 지속되고 봄기운은 오지 않으며, 육체는 살아 있으나

 

넋은 죽어 있어 그 사람이 비록 살아 있다고 하더라도 인생의 의미는 잃고 마는 것이다. 문학의 불용지용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했다. "근세 문명은 과학을 수단으로 하고 합리를

 

정신으로 하고 공리를 목적으로 한다. "대세가 이런데도 문학의 쓰임은 더욱 신비롭다.

 

그 까닭은 무엇인가? 우리의 정신과 마음을 함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함양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직분이요 쓰임이다..............

 

사회학의 입장에서 시를 바라보는 사람은 그 주장이 또 다르다. 그 요지는 문학과 도덕이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데 있다. 시에는 주요성분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관념의 진실이라 부른다. 그 진실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시인의 사상감정이 인류의 보편적인 관념과 일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지극히 넓은 경험에 의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의거하고 있는 사람들의 경험이 넓을수록 시가

 

넓은 것으로 간주한다. 이른바 도덕이라는 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관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시와 도덕의

 

밀접한 관계는 대자연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시와 도덕이 합치되면 관념의 진실이 이루어지므로 생명이 여기있고

 

영원성이 여기에 있다.그렇지 않은 것들은 반드시 사회규범과 배치된다. 사회규범에 배치되기 때문에 반드시 인류의

 

보편적인 관념에 반하고, 보편적인 관념에 반하기 때문에 반드시 관념의 진실을 얻지 못한다. 관념의 진실을 잃으면

 

그 시는 죽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가 죽는 것은 항상 도덕에 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가 도덕에 반하면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은 잠시뿐이라고 할 것이다. 시는 사악함이 없다는 설은 실로 여기에 꼭

 

들어맞는 경우이다. 가령 중국에 문예부흥의 날이 온다면, 이 설을 내세워 애써 그 싹을 자르려는 자가 틀림없이

 

떼를 지어 나타날 것이 우려된다. 그리고 유럽의 비평가들 역시 대부분 이러한 설을 가지고 문학을 규제하고 있다.

 

19세기 초 세계는 프랑스혁명의 풍조에 동요하여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가 모두 일어나 지난날의 꿈에서

 

하루아침에 깨어났으나 오직 영국만이 움직임이 비교적 없었다. 그러나 위아래가 서로 충돌하여 때때로 불평이

 

생기더니 시인 바이런이 바로 이때 태어났다. 그 이전의 스코트(W.Scott)등은 그 문장이 평온하고 상세한 사실만

 

추구하여 옛 종교도덕과 대단히 융화가 잘 되었다. 바이런에 이르러 옛 규범에서 벗어나 믿는바를 직서했고

 

그 문장은 강건, 저항, 파괴, 도전의 소리가 담겨 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평화로운 사람은 두렵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그를 사탄이라 불렀다. 이말은 사우디(R. Southey)에서 비롯되었고 많은 사람이 이에 동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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