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16. 18:30

노암 촘스키의 "여론조작"

 

 

 

 

 

 

 

 

 

 

선전 [宣傳, 프로파간다(propaganda)] 

어떤 사물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장 등을 남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는 일 또는 그 활동. 


16세기 그레고리우스 13세 통치하의 로마에서 신앙의 보급(데 프로파간다 피데)을 위한 교단이 설립되었는데, 이때의 '프로파간다'라는 라틴어를 그대로 '선전'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처럼 선전은 발생적으로는 종교상의 포교(布敎)에서 비롯되었지만, 오늘날 선전활동이 전개되는 장(場)은 인간생활의 특정 분야에 국한하지 않고, 종교·도덕·정치·사상·경제 등 광범한 분야에 이르고 있다(단, 상품에 대한 소비 대중의 구매욕을 자극하기 위한 상업선전은 광고로 구별함).

 

사회주의 국가의 교육은 자유주의 국가에서 볼 때 사회주의의 선전이나 다름없는데, 이처럼 선전과 그 관련활동(교육활동·포교활동)과의 한계는 명료하지 않으며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선전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실체는 단일·불변의 개념은 아니다. 

 


 

 

다음은 국어사전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프로파간다 [propaganda]  

[명사]<사회>어떤 것의 존재나 효능 또는 주장 따위를 남에게 설명하여 동의를 구하는 일이나 활동. 주로 사상이나 교의 따위의 선전을 이른다

 

 

출처http://yonnie.egloos.com/viewer/671958

여론의 조작과 대중의 여론. 단순 여론조작 세력인 언론의 문제인가, 대중의 무책임성에 근거한 것인가


  여론을 형성하는 기능은 언론의 주요 기능 중 하나이다. 사람들은 종이 신문을 보지 않고, 뉴스조차 무관심하다는 태도이지만 사실 우리는 그 빈자리를 포털 사이트의 메인페이지를 익스플로러 첫 페이지로 해두고 매일 같이 정보와 알게 모르게 여론에 휩쓸리기도, 비판하기도 한다. 우린 뉴스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언론이 사실을 바탕으로 엮어낸 2차 가공물을 보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들마저 또 한 번 걸러낸 3차적인 포털 사이트 메인 페이지 기사들을 보는 것일까? 그런데 이 때 우리는 이마저 알고 있다. 포털 주요 메인기사가 포털 담당자에 의해서 선별되고 그의 중요도에 따라 배치가 된다는 사실을. 그런데 왜, 우리는 그에 비판적 자세로 수용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여론에,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에 휘둘리는 걸까?


1. 여론 조작 by 노엄 촘스키

  여론은 정말로 '조작'되고 있는가. '조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은 대단했다. 대놓고 언론더러 여론 조작하고 있지? 라는 물음을 들이미는 촘스키는 <여론 조작>책을 통해 여론이 형성될 때 언론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과 그 영향력이 가장 극대화 되는 상황들에 대해 서술했다. 만약 나에게 인간이 하는 일중에 과연 완벽하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일이 있을 수 있느냐는 질문에서 나는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럼 사람이 만든 언론은?'이라는 질문에는 선뜻 '그렇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기자는 최대한 객관적 시각으로 보도해야 옳고, 또 그러한 뉴스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도가 불분명하거나 정당성을 얻지 못한 전쟁 상황이라 한들, 어느 국내 언론이 전쟁 수행중의 국가를 비난할 수 있을까? 후대에는 객관적 언론으로 인정받을지 몰라도, 전쟁 수행 중에는 국민 여론 분열과 사회 분열을 조장한다는 비난을 감수해야할 것이다.

  <여론조작>에서 주로 설명하고 있는 60년대의 미국의 베트남전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최근의 미국의 아프간-이라크 전쟁, 혹은 리비아를 공습한 연합군에 대한 서방의 언론들의 태도를 통해 같은 사건을 두고 어떤 시각을 보일 수 있는지, 그리고 또 여론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아프간-이라크 전쟁 수행 당시 뉴욕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 등 미국 주요 메이저 언론의 보도 방식, 혹은 보도 초점을 살펴보면 그것이 아랍권 뉴스들과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위는 뉴욕 타임스와 이집트의 중동 타임스, 사우디아라비아의 아랍 뉴스가 각각 같은 전쟁을 보도할 때 주로 어떤 사안에 대해서 보도했는지를 보여주는 통계적 자료이다. (이창호, <뉴욕 타임스, 아랍 뉴스, 중동 타임스의 이라크 전쟁 보도 비교>) 참고한 자료에 의하면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와 같은 미국의 메이저 언론의 경우 기사를 쓸 때 사용한 소스부터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서방 언론의 경우 주로 미 행정부를 통해 나오는 공식적 정보를 많이 인용했으며 미국의 전쟁에 대한 노력에 대한 언급이 많았다. 중동 언론은 아랍 현지의 소스를 많이 인용하면서 현지에서 일어나고 있는 반전 문제가 주요 관심이었다. 특히 뉴스를 보는 대중들이 가장 시각적으로 크게 영향을 받는 보도 사진의 경우에는 큰 차이를 보였다. 뉴욕 타임스가 작전 수행중의 미군의 사진이나 성조기, 다친 미군의 사진을 주로 내보낸 것과 달리 중동권의 뉴스의 경우 시아파 성전이 미국의 무차별 폭격으로 무너지는 장면이나, 민간인 특히 여성과 아이가 폭격으로 인해 건물 잔해 사이에서 시체로 발견된 사진들을 여과 없이 내보내는 모습 등을 보여주었다.


<미국 보도사진 vs. 아랍 보도사진>



 

 

2. 보도사진

  우리는 보도 사진에 대한 이슈를 이미 가까운 곳에서 직접 경험했다. 연평도 포격 사건 때의 일부 언론의 지나친 포토샵 처리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보도 사진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가장 큰 오류중에 하나이다. 조금 더 시각적으로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크롭(crop, 사진의 일부만을 자르거나, 일부를 잘라내는 것)효과를 주거나, 색조, 명도 등을 조절하여 더욱 더 극적으로 만드는 것(이펙터)이다. 이러한 사진을 원본 없이 본다면 당연히 원래 일어난 사실 그 자체보다 더욱 더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상황이 생길 것이고, 이번 조선닷컴의 크롭과 색감조절 효과는 일각에서 보도사진의 정확성, 객관성에 대한 의구심을 제기했고, 여론 형성에 즉각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보도사진의 기준과 효과 적용 수준을 논해야 한다는 의견 또한 적지 않았다. 여전히 크롭과 이펙터는 보정이냐 아니냐, 조작이냐 아니냐의 논란이 있지만 원본 자체를 그대로 전달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충분히 의미의 조작화가 이루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연평도 사진 비교>
위: 원본
아래: 조선닷컴 보도사진



 


 

 

  이렇듯이 우리는 언론이 어떠한 보도 행태를 보이느냐에 따라서 손쉽게 조작당할 수 있는 대중들이다. 대중들은 여전히 우매한가? 이것은 어떤 프레임(frame)을 가지고 언론이 사실들을 전달하느냐에 따라 쉽게 변할 수 있는 우리의 심리적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경제적 인간으로서의 경제적 행동과 어떤 인지적 판단을 하느냐하는 문제가 연결되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니얼 카너먼의 행동경제학에 대한 책 내용을 참고하였다.(팀 하포드, <경제학 콘서트 2>와 네이버 캐스트 교양경제학 참고.) 대니얼 카너먼과 아모스 트버츠키가 수행한 신종 전염병에 관한 연구에 대한 실험은 프레이밍(framing) 이론을 설명한다. 이 실험은 주로 위험회피적인 성향을 설명하는데 쓰이기도 하지만, 질문을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대답이 달라지는 것을 설명하기도 한다. 즉 질문자가 어떤 의도의 틀을 가지고 묻느냐에 따라 응답자들은 같은 내용도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한다는 결과를 만드는 것이다. 이 두 학자의 두 개의 질문을 살펴보자.

1번 질문: A안에 따르면 200명이 살게 된다. B안에 따르면 600명이 다 살 확률이 1/3, 아무도 살지 못할 확률이 2/3다.

2번 질문: A안에 따르면 400명이 죽는다. B안에 따르면 아무도 죽지 않을 확률이 1/3, 600명이 다 죽을 확률이 2/3다.

자세히 살펴보면 두 상황 모두 같은 말을 다르게 써 놓았을 뿐이다.

같은 말을 다르게 써 놓는다. <여론 조작>에서 말하는 언론들의 보도 역시 그러했다.


2. 당신은 왜 침묵하십니까?

  이렇게 언론들이 의도적으로 조작하는 소위 '여론몰이', '여론조작'에 대해 사람들은 더 이상 일방적 수용자로서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으며 특히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런데도 여론은 여전히 언론이 의도하는 대로 따라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으며 여전히 '기사에 그렇게 났으니까'라는 이유로 자신이 읽거나 보는 선호 언론사의 시각에 그대로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비판적 수용자의 모습과 함께 무비판적인 대중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잘못된 줄 알면서도, 집단은 움직이지 않는다. 도대체 왜 그런 것일까? 여기에는 '집단행동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집단행동의 문제는 커뮤니케이션 이론 수업과 관련 서적들에서 자주 볼 수 있었는데, 특히 이번 학기 수강했던 '국제정치경제론'이라는 수업에서 죄수의 딜레마와 연관 시켜 설명해주신 부분이 있어서 그 부분을 참고하였다.

  우선, 흔히 아는 죄수의 딜레마는 두 죄수가 서로의 의도를 모른 상태로 각자 심문을 받을 때 경찰에 자수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선택을 하는 상황을 가정한다. 이를 집단행동의 문제로 옮겨오면, 집단 내의 개인이 자신에게 더 유리하도록 의견을 개진하는 것을 '협력(C)'으로 표현하고, 아무 의견도 내지 않고 침묵하는 것을 '배신(D)'이라는 상황으로 표현한다. 여기에 개인이 A, 언론사, 혹은 여론 형성 기관, 정부를 B로 표현한다. 이 때 언론사 등은 개인의 의견을 받아들일 수도 있고(협력, C) 무시할 수도 있다(배신, D). 그 다음 계산법은 죄수의 딜레마와 같다. 자신은 배신하고 상대가 협력할 시(DC *앞이 A, 뒤가 B의 선택을 의미)가 가장 유리한 상황이고, 그 다음이 둘 다 협력하는 것(CC), 그 다음은 둘 다 배신하는 상황(DD), 마지막으로 가장 불리한 것은 자신은 협력했는데 상대는 배신한 상황(CD)이다. 그럼 이 각각의 상황에 매기는 점수를 4, 3, 2, 1로 매기면 다음 표로 정리할 수 있다.

A에게 유리한 순서: DC(4)>CC(3)>DD(2)>CD(1)

<죄수의 딜레마와 집단행동>

B(언론, 정부 등)

협력 C

배신 D

A(집단속의 개인)

협력 C

3, 3

1, 4

배신 D

4, 1

2, 2


 

  그럼 여기에서 B의 선택에 관계없이 A에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은 무엇인지 계산해보면, B가 언제나 협력한다고 가정할 시 A의 선택 중 더 높은 점수는 배신 쪽이다. 그리고 B가 언제나 배신할 경우 A의 선택 중 더 높은 점수는 역시 배신이다. B의 입장도 역시 A와 마찬가지이다. 그럼 다시 이 죄수의 딜레마를 집단 속 개인으로 바꿔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집단 속의 개인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던, 받아들여지지 않던 일단은 '침묵'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는 것이다.(내쉬 균형) 언뜻 보기에는 가장 높은 점수를 택하지 않은 경우 2의 선택을 한 것이 매우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상황이 사회 속에서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보인다.

  우리는 집단 속에서 소외될까봐 두려운 이유에서도 쉽게 자신의 의견을 개진하지 않지만, 나름대로 자신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계산을 해보는 것이다. 합리적인 것을 추구하다보면 전체적으로 비합리적 상황이 도출되는 이러한 상황은 대중들이 침묵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상황에 가장 잘 어울리는 말이 있어서 인용해 보았다.


인생을 쉽게, 그리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리 짓지 않고서는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된다. 언제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면 된다. - 니체, <권력에의 의지> 중



 

3. 여론조작, 더 이상 언론만 하는 것이 아닌 시대. 대중도 여론조작이 가능하다.

  여론조작의 문제가 이슈화 될 때마다 가장 먼저 지탄 받는 것은 언론사들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권위주의 정권을 겪으면서 언론이 정부의 입김에 따라 여론몰이를 하고, 사실을 조작하고, 공안사건으로 국민들의 레드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사례들을 수없이 많이 봐왔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기사들에 의해, 특히 최근 불거진 여러 가십에 의한 루머 등에 있어서 무비판적으로 신문기사에 의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가벼운 연예 가십의 경우 인터넷 기사가 뜨고 10분만에 주류 여론을 모으는 커뮤니티가 바로 개설되는 등 기이할 정도로 빠른 반응과 폭발적인 반응이 나타났다. 일명 '닷컴'열풍은 연예인 타블로 사태를 지나, '서태지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최근 '강대성닷컴'(빅뱅 멤버 대성의 뺑소니 사고 관련) 까지 실시간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각에서는 연예인을 향한 마녀사냥의 광적인 단면이라고 비판하고 있지만, 실상 인터넷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열풍에 너무도 쉽게 휩쓸릴 수 있다. 특히나 타블로 사태가 주는 핵심은 여러 가지 일 수 있다고 보는데 그 중에 하나는 바로 '선동'이다. 타진요 카페에서 글을 주로 올리던 사람들은 대체로 추상적인 사실들을 단호하고 강경하게 주장했다. 증거들을 제시하기도 했지만 그것들은 조악한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단언을 하는 선동에 증거까지 등장하니 말 그대로 쉽게 수긍했고 누구도 제대로 된 반박여론을 형성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이 상황은 마치 히틀러와 괴벨스의 선동과도 같았고, 자꾸만 히틀러의 대중선동, 나치즘의 열광하는 독일 국민들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인터넷이 발달하고 최근 실시간 커뮤니케이션이 어디서든 가능하도록 SNS와 스마트폰까지 보급되면서, 우리는 더욱 빠르게 여론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만큼 정부의 감시역할도 더욱 강화되었고 시민으로서 우리는 더욱 의견개진을 할 수 있는 통로가 많아졌다. 하지만 이러한 온라인 통로가 많아진 것은 우리가 잘못된 정보까지도 더욱 많이, 쉽게 노출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또 트위터와 같은 SNS를 통해 타진요와 같은 잘못된 여론 형성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부정적 면도 존재한다.

  여론 조작은 이제 더 이상 뉴스 전달자인 언론사들이나 정부 등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었다. 비록 그 영향력과 힘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소문'이라는 힘과 140자에 압축하는 과정에서 무엇은 빼고 무엇을 넣는가에 따라 대중들은 충분히 여론을 조작할 수 있는 집단이 되었다. 대중은 더 이상 수용자가 아니라 공급자일 수도 있는 이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들의 능력과 올바름에 대한 추구라고 생각한다. 인터넷의 세계에서는 '제 2의 히틀러'가 더욱 더 많이 존재할 수 있다. 진짜 히틀러와 다른 점이라면 그들은 얼굴을 드러내놓고 강단위에 서서 강력한 목소리로 호소하고 단언하는 것이 아니라, 얼굴과 이름마저 가린 채 유령처럼 존재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나 히틀러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쉽게 쓰이고, 더욱 자극적으로 쓰이는 글들을 누구나 양산할 수 있는 시대에 우리는 대중으로서, 그리고 또 일정 부분 공급자로서 책임 있는 의식과 책임 있는 말들을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심지어 우리는 블로그에 가벼운 포스팅을 할 때조차 글 내용 어느 부분을 굵게 처리하고, 밑줄을 긋고, '인용부호'를 넣어가며 의도를 강조할 수 있다.


참고문헌 및 웹페이지
노엄 촘스키, 에드워드 허먼 <여론조작>, 에코 리브르
네이버 캐스트 교양경제학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1863)
팀 하포드 저, 이진원 역,<경제학 콘서트2>, 웅진지식하우스
이창호, <뉴욕타임스, 아랍뉴스, 중동타임스의 이라크전쟁 보도 비교>, 한국언론학회, 48권 6호(2004년 12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