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humann
1. Ziemlich langsam - Lebhaft
2. Romanze (Ziemlich langsam)
3. Scherzo
4. Langsam - Lebhaft - Schneller - Presto
Wilhelm Furtwängler
Berliner Philharmoniker
- 01-01.Symphonie Nr. 4 d-moll op. 120 - 1.Satz- Ziemlich lang
- 01-02.Symphonie Nr. 4 d-moll op. 120 - 1.Satz- Ziemlich lang
- 02.Symphonie Nr. 4 d-moll op. 120 - 2.Satz- Romanze. Ziemlich l
- 03.Symphonie Nr. 4 d-moll op. 120 - 3.Satz- Scherzo, Lebhaft
- 04-01.Symphonie Nr. 4 d-moll op. 120 - 4.Satz- Langsam - Leb
- 04-02.Symphonie Nr. 4 d-moll op. 120 - 4.Satz- Langsam - Leb
아직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와 음악,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 Previouly contributed material at Classical Music, Vol.3(Nov. 1996) ; Corrected at Mar. 2000
악보에서 막 살아 나오는 음악
Yehudi Menuhin ; 그가 지휘하면 음악이 악보에서 살아 나오는 것 같았습니다.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정말 많이 바꿔 놓는다. 비근한 예로 우리 나라의 경우 임진왜란을 경계로 언어마저 크게 달라졌음을 들 수 있으며, 2차 세계대전을 경계로 세계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는 아직도 그 영향을 완전히 파악할 만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아마 시간이 좀 더 필요할 것이다. 음악이라고 예외는 물론 아니다. 2차 세계대전을 대략의 경계로, 개성 있는 거물급 지휘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음은 지휘 무대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오토 클렘페러가 1973년에 세상을 떴을 때 영국에서 '영웅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라고 그를 추모했던 것을 아쉽게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불행히도 이는 내가 관심을 갖고 있는 피아니스트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음악도 20세기의 '기계 문명'에 딸려가 버렸는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지 궁금하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내가 처음 음반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하던 시절에는 그런 사람이 있는지조차 몰랐었다. 나의 '음반구입 초창기'였던 고등학교 시절에 음반을 사러 같이 다니던 친구가 말해 준 일화를 말하자면, 그 친구는 자신의 친구 한 명에게 푸르트뱅글러를 소개했고, 그는 집 근처의 작은 레코드 가게에 가서 푸르트뱅글러의 음반(바이로이트 실황의 베토벤 교향곡 9번으로 기억한다)이 있느냐고 물었다. 가게 주인의 대답인즉; "왜 그런 무명의 지휘자를 찾나요? 카라얀도 있는데 그것으로 드리면 안될까요?" 그 무명의 지휘자를 20세기 최고의 지휘자로 떠받드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가게 주인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궁금하다.
이제 그의 음반은 국내의 웬만한 레코드 가게에서는 어디라도 5∼6종 이상은 볼 수 있으며, 이는 토스카니니보다 상당히 빈도가 많다. 벌써 세상을 떠난 지가 40년이 넘은 이 지휘자의 색바랜 모노랄 음반이 현대의 숱한 디지탈 녹음들이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서도 CD로 계속 재발매되고 찬사를 받는다.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은가? 동시에, 이 글에서는 그다지 자세히 알려지지 않은 그의 나치 협력에 대한 것을 다소 언급하고 지나가고자 한다. 과연 그는 나치에 어디까지 협력했는가?
성장기에서 정상까지
그의 정식 이름은 구스타프 하인리히 에른스트 마르틴(Gustav Heinrich Ernst Martin)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이다. 베를린에서 1886년 1월 25일 태어났다. 그는 지적(知的)으로 매우 축복받은 환경에서 자랐는데, 아버지 아돌프(Adolf)는 아주 유명한 고고학자였으며(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한글판을 보면 그의 아버지도 빌헬름 앞에 나와 있다), 어머니 아델하이트(Adelheid)는 화가였다고 한다. 부모는 1894년 그가 8세 때 뮌헨으로 이사했는데, 아버지가 뮌헨으로 교수 발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일찍부터 재능을 보였기 때문에, 부모는 일반 학교를 그만두게 하고 독일 일급의 선생에게 그의 교육을 맡겼다. 고고학자 루트비히 쿠르티우스(Ludwig Curtius), 조각가 아돌프 힐데브란트(Adolf Hildebrand), 예술사가 겸 음악 저술가로 베토벤에 대한 저작으로 유명한 발터 리츨러(Walter Riezler)등이 그의 선생이었다. 어린 빌헬름은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의 힐데브란트의 집에 가끔 가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음악이었고, 피아노를 배움과 동시에 7세 때부터 작곡했다. 동시에 작곡을 안톤 베어-발브룬(Anton Beer-Walbrunn), 요제프 라인베르거(Joseph Rheinberger)와 막스 폰 실링스(Max von Schillings; 후에 프러시아 국립오페라 단장)에게, 피아노는 콘라트 안조르게(Conrad Ansorge)에게 배웠다. 그는 17세 때까지 상당히 많은 음악을 작곡했는데, 교향곡 D장조를 비롯해 괴테의 '발푸르기스의 밤(Walpurgisnacht)'에 붙인 극 부수음악, 현 6중주곡 2개, 4중주곡, 소나타 등이고, 교향곡은 1903∼4년 시즌에 브레슬라우(Breslau, 현재는 폴란드 영토로 이름이 브로니슬라프 Bronislaw 로 바뀌었다)에서 공연되었는데 실패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일생을 통해 작곡을 결코 포기하지는 않았으며, 그 다음의 관심사가 바로 지휘였다. 지휘는 자신의 작품 을 연주하는 수단이었으며, 아버지가 죽은 1907년 이후 어머니와 자신의 생활을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했고, 동시에 그가 사랑하는 베토벤과 브람스, 브루크너 등의 거장들의 음악을 연주하는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1906년 그는 뮌헨 카임 관현악단(Kaim Orchestra)을 지휘해 지휘자로 데뷔했는데, 이 때의 프로그램은 데뷔하는 애송이 지휘자치고는 너무 과했다는 생각이 든다. 브루크너의 교향곡 9번과 베토벤의 '헌당식' 서곡, 자신의 교향적 라르고 b단조였으니 말이다. 그 평은 호평이 아니었고 평범한 정도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단원들에게 전달하는 능력이 모자란다"는 언급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평은 그의 나중 모습인 '비정통적 지휘 테크닉', 극단적으로 부정확하여 관현악단원을 거의 '물 먹이는' 비팅(beating)의 일단을 보여 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이 평이 호평이건 아니건 그는 지휘자로 빠르게 성장했다. 그는 1905∼6 시즌에 브레슬라우 시립 가극장의 레페티터(répétiteur, 오페라 연습을 할 때의 피아노 반주자)로 공적 경력을 시작하여, 다음 시즌에는 취리히에서 데뷔하고, 1907∼9년 펠릭스 모틀(Felix Mottl)밑에서 뮌헨 궁정 오페라에, 1910∼11 시즌에는 유명한 작곡가 한스 피츠너(Hans Pfitzner)가 음악감독으로 있던 스트라스부르(그 때는 독일 영토였다) 오페라의 제 3지휘자로 있었다. 이 경력이 바탕이 되어, 그는 1911년 처음 뤼벡 오페라의 정 지휘자로 지명되고(헤르만 아벤트로트 Hermann Abendroth 의 후임이었다) 이 자리에 1915년까지 재임한다. 이 후는 만하임 오페라에 1920년까지 있었는데, 이 동안 그는 뛰어난 지휘로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1919년 처음 빈 톤퀸스틀러(Wiener Tonkünstler) 관현악단의 가을 연주회에 정규적으로 출연하고, 이름 높은 음악이론가 하인리히 셴커(Heinrich Schenker) - 그의 이론은 음악의 의미에 중점을 둔 '변형 이론'이며, 이 이론은 현재 후고 리만(Hugo Riemann)의 이론과 함께 작곡 교육과정에서 뺄 수 없다 - 를 만나 그가 죽은 1935년까지 자신이 지휘할 스코어를 공부한다. 1920년 그는 프랑크푸르트 박물관 연주회와 베를린 국립 오페라의 연주회를 멩겔베르크와 R.슈트라우스와 나눠 지휘했다(이미 그의 평판이 이들과 동등했음을 의미한다).
그는 이미 1917년 12월 14일 베를린 필하모니를 객원지휘한 일이 있었다. 1922년 1월 23일 이 오케스트라의 상임이던 아르투르 니키쉬(Arthur Nikisch, 1855∼1922)가 세상을 떠나자, 그가 맡고 있던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에는 즉시 상임으로 취임했으며(1928년까지 재임. 후임은 브루노 발터) 베를린 필도 푸르트뱅글러를 상임으로 지명하면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푸르트뱅글러/베를린 필의 콤비가 탄생했다. 이 해에 빈 필하모니를 처음 지휘하고 상임 지휘자로 1927∼30년 재직했으며, 빈과 베를린의 두 필하모니는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악기'가 된다. 이 때부터 그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외에 다른 곳도 객원지휘하는데, 1924년 런던에 처음 등장하고 여기는 정기적으로 계속 출연한다. 1937년에는 베를린 필을 이끌고 객연하기도 하고, 38년에는 코벤트 가든에서 '반지'를 2회 지휘한다(2차대전 후에는 빈 필과 객연한 일도 있으며, 필하모니아 관현악단을 많이 지휘했다). 1925년부터 두 시즌 동안 뉴욕 필하모니의 객원 지휘자로 초청되었는데, 사교성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했던 푸르트뱅글러는 오케스트라 이사진에게 - 유럽과 다른 분위기다 - 잘 보이지 못했고, 게다가 토스카니니가 절대적인 평판을 받고 있던 미국의 분위기에서 평론가들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 1936년 '힌데미트 사건'후 토스카니니가 뉴욕 필의 지위를 물러나면서 푸르트뱅글러를 후임으로 제안했을 때 상당한 반대가 있었던 것도 아마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후임자는 결국 존 바비롤리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결국 1927년 이후 한 번도 지휘하지 않았다(1955년 베를린 필의 첫 미국 연주 여행이 계획되었으나 그는 1954년 서거했기 때문에 이 때 베를린 필을 지휘한 것이 카라얀이었고, 그 덕에 카라얀이 베를린 필의 상임이 된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 외 1931년 바이로이트 음악제의 음악 총감독(바그너 가문과 충돌해 다음 해 사임)을 맡았으며, 1933년 베를린 국립 오페라 총감독 및 수석 지휘자를 맡아서 나치가 등장하기 전에 완전히 독일-오스트리아 지휘계의 최정상에 군림한다.
제 3제국 시대
1933년부터 독일에서 정권을 잡은 히틀러는 그 뿐 아니라 수많은 독일 사람들에게 정말로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한국에서는 남의 나라 일처럼 얘기를 할 수 있겠지만, 독일 사람에게는 아직도 나치가 큰 도덕적인 부담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장본인일 뿐 아니라, 이 전쟁으로 인해 유럽에서만 자그마치 3,900만 명이 - 지금의 우리 나라 인구와 별 차가 없다 - 목숨을 잃었으며, 이 중에 나치가 죽인 유태인이 600만이나 된다. 독일에서는 신나치주의자들을 제외하면, 아직도 '나치'라고 누구에게 말한다면 큰 모욕일 수밖에 없다. 이 부분에서는 푸르트뱅글러의 일생 중 가장 어두운 시기였으며, 지금까지도 가끔 논란의 대상이 되는 나치 협력 문제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이하의 사실 논의는 대부분을 로베르트 바흐만(Robert Bachmann) 저 "Karajan, Anmerkungen zu einer Karriere(Econ Verlag, Düsseldorf und Wien, 1983)"의 한국어판인 '음악의 황제 카라얀 - 그 영광의 뒤안길(반광식 역, 월간오디오사 출판부, 1990)'에 의거하고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1932년 푸르트뱅글러가 처음 히틀러를 만났다는 설이 있다. 1935년에 베를린 겨울 자선 음악회에 참석하고 히틀러와 악수하는 사진이 남아 있으니까, 최소한 그 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열광적인 고전음악 애호가이자 아마츄어 피아니스트였으며, 그의 바그너에 대한 열광은 유명하니 음악계에도 손을 뻗쳤음은 당연하다(실제 바그너의 며느리 위니프레드에게 경제적인 지원을 하여 3년에 한 번 쉬던 바이로이트 음악제를 매년 열게 했으며, 이 때가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경제적인 사정이 문제가 되지 않던 유일한 시대라고들 한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것은 1933년 1월 30일이었으며, 그 때부터 '나의 투쟁 Mein Kampf '을 하나쯤 갖춰 놓지 않으면 비밀 경찰에 '찍히는' 시대였으니, 이 책에 나온 격렬한 반유대주의 내용을 푸르트뱅글러가 몰랐다고 한다면 발뺌에 불과하다. 또한 33년 4월 1일부터 유대인에 대한 불매운동이 개시되었으며, 7일에는 최초의 반유태인 법률이 제정되었으니 몰랐을 리도 없다. 나치는 그가 독일 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잡자마자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樞密院顧問, 제국 음악원 부의장)으로 임명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도 유태인 추방에 찬성하지 않았으며, 베를린과 빈 필하모니에 유태인 단원이 남을 수 있었던 것도 그의 덕이다. 하지만 이 자체가 전후에 나치 협력 시비의 큰 빌미가 된 것은 부정할 수가 없다.
1934년 말에 '힌데미트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푸르트뱅글러의 외면적인 태도를 크게 바꿔 놓는 동기가 된다. 그는 베를린 필로 3월에 이미 힌데미트의 오페라 '화가 마티스'의 교향곡판을 초연했는데, 나치는 힌데미트를 아내가 유태인이며 전위적 작곡가라는 점 때문에 경원시해 오고 있었다. 나치는 이 곡이 '선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는 점을 들어서 히틀러의 직접 허가가 없이는 오페라판의 공연이 불가능하다고 했으나, 그는 "예술에 대한 일에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결정한다"는 회답을 보냈다. 결국 오페라의 상연은 불가능했고, 11월 25일자 도이치 알게마이네 차이퉁(Deutsche Allgemeine Zeitung)지의 사설에 그가 쓴 글이 실렸는데, 이 '힌데미트 사건 Der Fall Hindemith'은 힌데미트를 옹호하면서 정치가 예술에 간섭하는 것을 비판했다. 이 글 하나 때문에 그는 12월 4일 베를린 필의 상임, 국립가극장 등 모든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힌데미트는 국립 음악학교 교장의 자리를 버리고 터키를 거쳐 미국으로 떠났고(푸르트뱅글러는 장시간 힌데미트를 설득했다고 하나, 힌데미트는 듣지 않았다), 국립가극장의 음악감독(Generalmusikdirektor) 지위에 있던 에리히 클라이버도 베르크의 룰루(Lulu)와 같은 '전위적 작품'의 초연이 금지된 후 역시 12월 4일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테아트로 콜론(Teatro Colón)으로 떠났다. 이것이 힌데미트 사건의 전말이다. 1935년 4월 그는 다시 베를린 필의 연주회에 복귀하는데, 이것은 그가 선전상 요셉 괴벨스(Joseph Goebbels)와 타협한 결과였다. 그리고 빈과 베를린의 필하모니를 계속 지휘하다가 게슈타포가 그를 추적하고 있는 것을 경고받고,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Albert Speer)의 조언에 따라, 1945년 1월 28일 빈 필과 연주한 후 2월 초 스위스로 망명한다.
1935년 4월의 타협에 대해 그 자신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당시 괴벨스 씨와 비정치적인 예술가로서 독일에 남기로 약속하고, 그도 그것은 가능하다고 보증했습니다. 나는 비정치적인 동안은 보호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대담에서 그는 베를린 필의 지휘자로 더 활동을 계속할 것에 동의했다. 이것은 1946년 12월 17일, 베를린 예술가 비(非)나치화[denazify] 위원회에서 그를 심리한 기록이다. 하지만 괴벨스 자신은 정말 푸르트뱅글러를 비정치적으로 남겨 두려 했을까? 아니면 그에게 비정치적인 가면을 씌워 이용하려 했을까?
사실은 후자에 더 가깝다. 푸르트뱅글러 자신의 말은 "비정치적이고도 초정치적인 예술가로서, 히틀러 정권하의 독일에 남아서 활동하여, 나치에 대항하는 활발한 책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괴벨스의 말 중 일부를 인용하자. "예술가들에게는 스스로를 비정치적이라 칭할 권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민족의 드라마를 그리고, 낡은 가치가 영락하고, 다른 가치가 상승하여 세계가 뒤집히는 순간에는 예술가라 할지라도 무관계를 주장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예술가에게도 크게 관계되는 문제인 것이다." 이것은 괴벨스의 문화에 관한 '기본적 논의'에서 나온 말이다. 자신이 공석에서 이렇게 발언했으면서도 푸르트뱅글러에게 그 반대의 말을 했다면, 푸르트뱅글러를 설득하기 위해 괴벨스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럽다. 위의 괴벨스의 말을 당연하다고 생각하건 아니건 간에, 많은 예술가들이 나치 치하에서 이용당한 것은 사실이며, 푸르트뱅글러도 실제로 자신이 비정치적이라 믿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치는 그를 그 뒤에 그냥 두지 않는다.
푸르트뱅글러의 공개적인 행동은 이 사건 후 그를 나치의 반대자로만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다. 1935년에 전술(前述)한 것과 같이 히틀러와 악수한 사진이 있는 것을 비롯하여, 1940년에 베를린 필이 점령지인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로 연주 여행했을 때의 전송 연설에서 다음처럼 발언했다. "독일 음악의 거장들은 그 작품 속에, 오늘날 우리들이 현실 세계에 실현하려 하는 것, 즉 독일인의 생명과 존재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새로운 독일을 건설하기 위한 어려운 임무를 맡아,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 즉 천하무비의 우리 국방군과 독일 음악의 거장들은 하나의 공통된 책임 아래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942년 2월 5∼12일 동안 그는 베를린 필과 함께 스톡홀름, 웁살라(Upsala), 마르메 및 점령 하의 덴마크로 연주여행했으며, 괴벨스에게 보고하고 있다. 괴벨스의 일기를 보면, "푸르트뱅글러가 찾아왔다. 그는 스웨덴, 덴마크를 연주 여행하여, 애국심으로 가득차 있다. 전혀 사람이 달라진 것 같아서 매우 기뻤다. 나는 푸르트뱅글러 때문에 몇 년이나 싸워왔는데 이제 그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는 나의 라디오, 영화 정책에 전적으로 찬성하여 기꺼이 협력하겠다고 했다."는 부분이 있다. 1942년 4월 19일, 그는 히틀러 생신 기념 식전에서 필하모니 홀에 모인 당과 정부의 요인 앞에서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중 '에어'와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했다. 이것은 명백하게 표면상 비정치적 인물로 알려진 그를 이용한 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는 프레드 K.프리베르크(Fred K.Prieberg)의 '나치 국가에서 음악(Musik in NS-Staat, 프랑크푸르트, 1982)'에서 인용된 다음 글에서 명백해진다. "푸르트뱅글러와 베를린 필은 코펜하겐에서 어떤 군악대 콘서트보다도 나은 효과를 발휘했다. 파리에서 가진 카라얀과 베를린 국립관현악단의 연주회는 프랑스인에게는 베르사이유 궁정에서 열린 '독일 녀석의 군악 식전'에 필적할 만큼 모욕적인 것이었다." 이 모든 사실이 푸르트뱅글러의 "나는 비정치적으로 ... "라는 말로 변명이 될 수 있을까.
가능한 설명은 그의 인간성에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푸르트뱅글러 자신의 말로는 1933년 6월에 나치가 유태인 문제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나치 아래에서 음악계의 대표자로 남아 있었다는 것은, 좋게 생각하면 '자신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다른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기보다는 독일 내의 (유태인) 음악가들에게 더 나을 것이다' 이고, 나쁘게 생각하자면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아도 나는 여기서 그럭저럭 할 만 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까. 전자가 사실이라면 그는 순교자적인 취급을 받아야 하며(이렇다면, 왜 그가 카라얀을 생애의 끝까지 그렇게 못살게 굴었는지가 설명 안 되는 점은 있다), 후자 쪽이라면 기회주의자라고 봐야 한다. 개인적으로는, 반반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인간성이 어땠는지는, 다음 페이지를 참고하시기 바란다.
그리고 나치 초기 독일을 떠난 예술가들이 그에게 한 말들도 영향이 없었으리라 보긴 어렵다. 쇤베르크가 독일을 떠나면서 "여기 반드시 남아서, 좋은 음악들을 지휘하시죠."라고 한 것이나, 당시 세계 최고의 연출가 중 하나였던 막스 라인하르트(Max Reinhardt)처럼 "독일이 살아남으려면 푸르트뱅글러 같은 사람이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한 사람들이 있다. 푸르트뱅글러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토마스 만이 "어떻게 히믈러(SS의 우두머리)의 독일에서 베토벤이 연주될 수 있단 말이오?" 하고 물었을 때 그는 화를 내며 "히믈러의 독일보다 베토벤이 더 필요한 곳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라 응수했다는 일화가 있으니까.
정치적인 측면에서는 민감하지 못한 순진한 성격에서도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슈페어는 그의 '회상록' 중에서 푸르트뱅글러에 대해 "1944년 12월 중순, 베를린에서 최후의 필하모니 콘서트가 끝나고, 그는 나를 지휘자 대기실로 불러들였다. 그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세상사를 초월한 사람처럼, 우리가 이 전쟁에서 이길 가망이 아직 있느나고, 탁 털어놓고 나에게 물었다."고 적었다. 우리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가 하는 행동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푸르트벵글러는 거의 확실히 바로 그런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어떤 면에서 그의 태도는 역시 나치 치하에 남아 있었던 에트빈 피셔를 연상시키는 데가 있는데(역시 주위 사람들이 'naive'하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피셔는 30년대 후반에 바젤에서 아돌프 부쉬의 초대로 저녁을 같이 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부쉬는 그에게 베를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물었고, 피셔는 새로운 기회가 많이 생겨서 아주 잘 지내고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부쉬는 피셔에게 더 이상 저녁을 같이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조용히 말했다고 한다(Koch CD 3-7701-2 H1의 해설에서 인용). 추방되거나 떠난 음악가들 덕에 그런 기회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피셔가 알고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들의 평은 어떨까? 비교적 날카롭게 판단한 글을 보면;
프리델린트 바그너(바그너의 큰손녀, 1944년); '푸르트뱅글러의 비극'은 독일 내에서는 반나치로 찍혀 경멸당하고 해외에서는 나치로 저주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 우리가 재판을 해야 한다면, 우리는 그의 나약한 성격을 탓하든가 용서하든가의 양자택일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확고한 결정을 내리기를 주저했던 것이다.
푸르트뱅글러를 인터뷰한 기자;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 그는 자신이 유태인 음악가들을 보호하는데 위험을 무릅썼으며 독일 음악의 가치를 보존하는 데 전력을 다했지만, 그 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치처럼 불쌍한 사람으로 느껴졌다. 나는 그 자신이 스스로 경직성, 덕과 매력과 인간적 따뜻함의 결여를 거의 병적으로 자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속단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프리델린트 바그너의 의견과 가깝다. 한 약한 인간이 확고한 주관이 없어서 사회 전체의 거대한 비도덕적 흐름에 희생된 사례다. 여기서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어쨌건 푸르트뱅글러는 카라얀처럼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이중으로 나치당 당원으로 가입하여 출세하려고 하지는 않았으며(이미 독일 최고의 위치에 있었으니 그럴 필요도 없었다), 전쟁 중에도 끝까지 나치 당원이 되지 않으며 여러 모로 '최소한의 양심'을 보였고, 유태인 음악가들을 구하려 진력했다는 점이다. 나는 이것이 카라얀보다 푸르트뱅글러의 인간적인 면모를 한층 돋보이게 해 주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그는 샤를르 뮌시(그와 브루노 발터의 상임 시기에 게반트하우스에서 콘서트마스터로 있었고, 이 후에 프랑스로 가 지휘자로 독립했다)에게 "되도록 점령국에서는 연주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대포와 탱크를 뒤에 놓고 연주할 수는 없지 않냐는 것이 이유였다. 몇 명을 제외하고 베를린과 빈 필하모닉에 유태계 단원들이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덕이며, 특히 빈 필하모닉은 "푸르트뱅글러가 구원했다"고 회자된다. 또, 부인 엘리자베트(Elisabeth)에게 "우리 독일 국민은 적어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 우리가 저질렀던 그 죄악으로부터 면제될 수 없을 것이오. 우리가 죽은 다음에는 애들이 그 업보를 지게 되겠지."라고 말했다고 한다(물론 부인의 말을 어떻게 100% 믿을 수 있겠냐는 말도 있다). 카라얀은 잘츠부르크에서 연합국 조사관들에게 자신의 나치 가입 경력을 속였으며, 나치당에서 탈퇴한 일이 없는데도 한 것처럼 속였다(이 말은 그가 죽을 때까지 그의 대부분의 전기 작가들이 계속 선전해 오던 왜곡된 내용이다). 그리고 무엇이라 말하고 있는가? "나는 양심의 가책 따위는 전혀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라든가, 심지어 "다시 한 번 똑같은 일을 할 것입니다" 라고까지 말했다. [ 개인적으로, 카라얀은 나치 문제에 대해서는 변명할 말이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유태계인 아르투르 루빈슈타인의 말처럼, '그는 나치의 빨치산이었으니까'란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
결국, 푸르트뱅글러가 지금까지도 나치 협력의 망령에 시달리는 것은 그의 '나약한 성격'이 가져온 형벌이며, 그 자신만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다. 사실 다른 사례를 보면 푸르트뱅글러 같은 전세계적 인물에게는 꼭 공개적으로 나치 지지 발언(위의 베를린 필 전송시의 발언 같은)을 해야 할 의무가 없었다. 물론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물리학자 막스 폰 라우에(Max von Laue, 노벨상 수상자)는 여러 점에서 공공연한 반나치 입장을 보이면서도 견딜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소 냉정히 말하여,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푸르트뱅글러 자신의 문제가 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는 매우 연민을 느끼지만, '푸르트뱅글러의 비극'이 결국은 그의 성격에 원인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최만년(最晩年)
그가 스위스로 망명한 후, 5월 7일에 전쟁이 끝났다. 그가 다시 유럽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소에서 비(非)나치화 판결을 받아야 했다. 진상이 어쨌건, 이 위원회는 1947년 1월에 푸르트뱅글러에 대해 무죄 판결을 내렸다. 2월에 시카고 심포니에서 그를 상임으로 맞으려고 했으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실행되지 못했다. 시카고 심포니의 입장으로 보면, 전통적으로 독일음악을 자주 연주하는 이 악단으로서는 사실 매우 아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를 맨 처음 초청한 것은 이탈리아 로마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 오케스트라였고(4월 6일), 베를린 필에 복귀한다. 이 연주회는 5월 26~28일에 있었는데, 연주 장소는 베를린의 티타니아 궁전(Titania-Palast)으로, 필하모니 홀이 공습으로 파괴되는 통에 대신 사용하던 곳이었다(필하모니 홀은 뒤에 카라얀이 재건하며, 그 동안 베를린 필은 티타니아 궁전, 예수 그리스도 교회, 달렘의 게마인데하우스 등에서 연주해야 했다). 26일의 프로그램에는 베토벤 교향곡 5,6번이, 27일의 연주회는 역시 베토벤의 교향곡 5번과 에그몬트 서곡이 있었다. 첫날의 연주는 Music & Arts와 Tahra 등에서, 둘째날의 연주는 DG에서 발매했다. 그의 베토벤을 아는 데 매우 흥미 있는 음반이다. 같은 해 여름 그는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다시 출연하고(그가 죽던 해까지 거의 매년), 빈 필과 녹음을 재개했다. 만년까지 스튜디오 녹음은 베를린 필과 DG에서 한 것보다 빈 필과 EMI에서 한 것이 압도적으로 더 많다. [ 참고; 27일 연주회는 소련군 점령 지역의 방송 홀에서 초대된 청중 앞에서 가졌다고 차후 조사 결과 밝혀졌다. ]
그는 다시 유럽 전역을 연주 여행하며, 어디에서나 환영받았다. 1948년에는 스웨덴의 객원 지휘(스톡홀름 필하모닉으로, 베토벤 교향곡 8번과 레오노레 서곡, 독일 레퀴엠 등의 실황 녹음이 있다), 그리고 빈 필하모닉을 이끌고 런던으로 연주여행했으며, 이탈리아 연주 여행으로 50년 라 스칼라에서 플라그슈타트 등을 주역으로 하여 '반지'를 지휘했다(실황녹음이 있다). 1951년 베를린 필과 함께 이탈리아, 이집트(카이로) 등을 연주여행했으며, 7월 29일 전쟁 후 처음 개시된 바이로이트의 개막공연에서 역사적인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연주했는데 이 연주는 동곡(同曲)의 최고의 연주로 완전히 인정받고 있다. 1952년에는 베를린 필의 상임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는 이 때 완전히 전쟁 전처럼 전성기를 다시 맞이한 느낌이었으나, 그의 건강은 이미 40년대초반부터 나빠지기 시작했다. 1944년 6월에 이미 자신의 건강을 걱정하는 말이 그의 편지에 있으며, 50년대부터는 상당히 자주 앓아 누웠다. 52년에는 폐렴 때문에 상당 기간 병석에 있었으며, 53년에는 빈의 연주회에서 연주 도중 쓰러졌다. 최후의 해에는 일시적으로 나아지는 것 같아 보였으며, 바이로이트, 잘츠부르크('돈 조반니'의 실황 녹음이 유명하다), 뤼체른 음악제에 출연했다. 여기서 필하모니아 관현악단과 녹음한 베토벤 '합창'의 실황은 최근 Tahra와 Music & Arts에서 재발매되었으며 매우 좋은 녹음으로 권할 만 하다. 이 녹음은 8월 22일의 연주회인데, 실황 녹음으로 구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그의 최후의 녹음 중 하나이다. 이 후에 그는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9월 19일과 20일 베토벤 교향곡 1번과 자신의 교향곡 2번을 연주하였는데, 이것이 그의 마지막 연주회였다(19일의 연주회 실황녹음이 Tahra에서 발매되었다). 그의 '정말 최후의 연주'는 빈 필하모니와 9월 28일∼10월 6일까지 빈 무직페라인잘에서 스튜디오 녹음한 '발퀴레'(EMI)이다. 녹음을 마친 후에 바덴바덴(Baden-Baden)으로 옮겼으나, 폐렴이 악화되어 11월 30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68로, 지휘자로서는 그다지 길지 않은, 아쉬움이 많은 나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12월 4일 하이델베르크의 성령교회(Heiliggeistkirche)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베를린 필하모니가 오이겐 요훔의 지휘봉 아래에서 추도음악을 연주했으며, 그는 어머니 옆에 묻혔다고 한다.
글-이영록의 음악페이지 http://fischer.hosting.paran.com/music/music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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