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2. 15. 17:10

쇼팽 녹턴 디노 치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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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lde hassam - Nocturne, Railway Crossing, Chicago 18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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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의 유일한 사진 (1849년, 그가 죽은 해에 찍었다.)

프레데리크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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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데리크 프랑수아 쇼팽(Frédéric François Chopin, 1810년 3월 1일 ~ 1849년 10월 17일)은 가장 위대한 폴란드의 작곡가이자 가장 위대한 피아노곡 작곡가 중의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프레데리크 프랑수아는 그가 20세 때 폴란드를 떠나고 프랑스에서 살게 되었을 때 쓰던 프랑스어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프리데리크 프란치셰크 호핀(Fryderyk Franciszek Chopin)이지만, 폴란드어권에서도 프랑스 발음에 맞추어 성을 ‘쇼펜(Szopen)’이라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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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Żelazowa Wola 마을에 있는 쇼팽의 생가



쇼팽 자신과 가족은 쇼팽이 1810년 3월 1일에 태어났다고 말하지만 로마 가톨릭교회 세례 기록을 보면 2월 22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출생 날짜는 그보다 몇 주일 전일 것이다. 쇼팽은 쇼팽의 재능은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어 그것이 모차르트에 비견될 정도였다. 7살 때 이미 두 개의 폴로네이즈를 작곡했다. 그의 천재성이 바르샤바에 보도되면서 귀족들에게 관심을 끌게 되었고 자선공연도 하기 시작하였다. 그의 첫 피아노 레슨은 1816년에 바이올리니스트 보이치에흐 지브니에게 받게 되었는데, 1822년 스승은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고 하여 스스로 그만 두었다.


이후 쇼팽은 바르샤바 콘소바토리의 교수이자 피아니스트인 빌헬름 뷔르펠(Wilhelm Würfel)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823년부터 1826까지 그의 아버지가 교수로 재직해 있는 Warsaw Lyceum을 다녔다. 그는 가족과 함께 넓은 2층 주택에서 살았다. 1826년 가을부터 쇼팽은 Warsaw School of Music에서 작곡을 배우기 시작하였다.1831년 그는 폴란드를 떠나 프랑스와 비엔나로 이주하여 파리 근처에서 여생을 보낸다. 일생을 폐결핵에 시달리게 된 것도 그때부터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살때 러시아의 식민통치에 반대한 폴란드인들의 혁명이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낙심할 정도로 애국심이 강했는데, 폐결핵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죽음이 임박한 말년에도 폴란드 난민들을 위한 연주회에 참여했다.

파리에서의 업적

1830년대 초중반의 파리는 작곡가를 위한 시기였다. 쇼팽이 유명한 작품들을 남긴 것이 이 때이다. 1838년경에 그는 파리 시민들에게 유명해졌다. 그의 친구로 프란츠 리스트, 빈첸초 벨리니, 외젠 들라크루아가 있었다. 쇼팽은 헥토르 베를리오즈와 로베르트 슈만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마리아 보진스카의 자화상 (1830년대)

1836년에 쇼팽은 17살의 폴란드 소녀인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와 비밀 약혼을 했고 나중에 취소했다. 같은 해에, 마리 다굴(Marie d'Agoult) 백작 부인이 연 파티에서 쇼팽은 소설가이자 애인인 조르주 상드를 만났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

조르주 상드

쇼팽과 상드의 연애관계는 1830년대 후반에 시작되었다. 상드와 달리 쇼팽은 성적인 능력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의 애정 관계는 10년간 지속되었고, 쇼팽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헤어졌다.

쇼팽과 조르주 상드는 스페인 마요르카의 버려진 로마 가톨릭교회 수도원인 발데모사(Valldemossa) 수도원 근처의 오두막에서 지낸 적이 있는데, 1838년 ~ 1839년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쳤다. 쇼팽은 파리에서 먼 길을 거쳐 피아노를 가져와서 언덕에 있는 수도원으로 옮겨야만 했다. 쇼팽은 그 절박한 시간의 기분을 스물 네 개의 전주곡(작 품번호 28)에 담았다. 그 작품의 대부분은 마요르카에서 쓰여진 것이다. 추위는 쇼팽의 건강과 폐병에 큰 타격을 주었고, 그와 조르주상드의 관계가 불륜으로 의심받아 비난과 푸대접을 받았다. 결국 파리로 돌아가야만 했다. 쇼팽은 그 일 이후로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죽음

1840년대에 쇼팽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그와 상드는 Nohant-Vic을 포함한 많은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1849년 쇼팽은 모든 작품을 완성하고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했다. 그의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 바 단조로 폴란드를 생각하면서 지은 민족주의적인 곡이다.

1849년 쇼팽은 사망했다. 공식적인 사인은 폐결핵이지만 그의 친지가 부검한 결과가 이전 검진결과와 다르다는 점 때문에 낭포성 섬유증이나 폐기종 같은 다른 질병을 앓지 않았느냐는 주장도 있다.

로마 가톨릭 성 마들렌 교회에서 열리게 된 그의 장례식에는 그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 을 연주하기로 했다. 레퀴엠에는 여자 성악가의 역할이 크지만 마들렌 교회에서는 합창단에 여자 가수를 허용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마찰 때문에 장례식이 2주 동안 연기되었고, 결국 교회 측에서 쇼팽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양보했다. 쇼팽의 시신은 파리 Père Lachaise에 안장되었고 그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聖 십자가 교회에 있는 기념비에 묻혔다.

작품

쇼팽은 살롱음악인 녹턴을 깊고 세련된 장르로 승화시켰으며, 일반적인 춤곡인 폴란드의 마주르카나 빈의 왈츠의 선율과 표현의 폭을 넓혔다. 전주곡을 독립적인 장르로 만들었다.

쇼팽의 곡은 독특한 선율로 많은 대중들에게 공감을 만들어낸다. 그 중에는 《혁명 연습곡》과 《강아지 왈츠》이 있다. 《장송 행진곡》은 지금까지도 슬픔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곡으로 쓰이고 있다. 《즉흥 환상곡》는 쇼팽 시절의 오페라 선율을 모방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반음계를 구사한 곡이다. 쇼팽은 노래하는 목소리의 아름다움을 재현하기 위해 피아노를 쓴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종종 자신이 도니제티와 빈첸초 벨리니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고 말했다.

쇼팽의 작품과 재능은 다른 작곡가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슈만은 쇼팽의 선율을 따서 작곡한 그의 《Carnaval Suite》를 쇼팽에게 헌정했다. 프란츠 리스트는 그의 《Harmonies Poétiques et Religieuses》 가운데 한 악장인 〈Funérailles〉를 쇼팽에게 헌정했고 그 때가 의미심장하게도 1849년 10월이었다. 그 곡의 중간 부분은 쇼팽의 유명한 폴로네이즈 53번의 옥타브 트리오가 연상되게 한다.

전주곡과 연습곡을 포함한 많은 쇼팽의 곡들이 그만의 고유한 기교를 띄고 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과 슈만의 《교향적 연습곡》은 이 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서양 고전음악에서 쇼팽의 음악은 낭만주의 시대에 속한다. 하지만 쇼팽 자신은 낭만주의 조류에 관심이 없었거나 싫어했고 자기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쇼팽의 작품을 전형적인 낭만주의 음악으로 본다.

모든 그의 작품에는 피아노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작품이 피아노 독주를 위한 것이지만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위한 몇몇 곡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