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0:17

베토벤 - 교향곡 9번 "합창" 게오르그 솔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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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mphony No. 9 in D minor op. 125




1.Allegro ma non troppo, un poco maestoso

2.Molto vivace

3.Adagio molto e cantabile

4.Presto - Allegro assai - Andante maestoso - Allegro energico, sempre ben marcato



교향곡 9번 합창 D단조 Op.125

쉴러(Schillers)의 "환희에 부침" 이란 시에 의한 합창이 있는 교향곡이다. 흔히 이 곡은 코랄(Coral Symphony) 심포니라 부르는데 이 명작은 그의 고향인 본 시대부터 착상하여 1798년의 작곡 스케치북에 이 시의 일부가 멜로디와 함께 기록되어 있었다.

1822년 런던 필하모니 소사이어티로부터 교향곡 작곡의 청탁의뢰를 받은것이 이 작품 실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마침내 이 거작은 1823년 말경에 완성 되었는데 무려 31-2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하여 인간을 초월한 인류 최고의 예술 작품은 1824년 5월7일 빈에서 작곡자 자신의 지휘로 초연 되었다.

이 때의 실질상의 지휘는 미하엘 움라우프와 악장은 슈판지히 등이 담당 하였다. 이 음악 속에는 인간이 가진 모든 희노애락에 대한 깊은공감과 그의 해석, 다시 말해서 그의 철학인 동시에 인생관을 여기에 피력한 것이다.


1악장  알레그로 마 논 트로포 운 포코 마에스토소 D단조 2/4박자 소나타 형식

빠른 템포의 신비로운 서주로 시작하는데 무언가를 희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2악장  몰토 비바체 D단조  3/4박자 스케르초

밝고 기쁨에 찬 악장이다. 여기서는 종래의 원칙을 무시하고 빠르게 연주 한다. 그런데 고전 교향곡에 있어서는 제2악장에 가요형식을 썼지만 그는 그같은 순서를 변경하였다. 정열적인 음악 이랄까, 혹은 자유분방한 야성적인 혼이 난무가 빛나는 생명의 리듬으로 약동하는데, 이 교향곡 중에서 가장 우수한 악장이다.


3악장  아다지오 몰토 에 칸타빌레 모데라토 B플랫장조  4/4박자

조용한 명상 가운데서도 정열에 잠긴 번뇌가 떠도는데 그러면서도 아름다움에 차있다. 극히 세련된 격조높은 시적인 정취가 넘쳐 흐른다. 지금까지의 격렬한 흥분과는 달리 어딘가 명상적인 애정과 동경을 가지고 노래하는 기분이다. 현악기에 나타난 아름다운 선율을 목관악기로 이에 응답한다. 여기서 그 귀한 스타일과 깊은 표현력을 찾아 볼 수 있다. 2개의 테마는 변주 반복되며, 나중에는 2개의 악장과는 다른 나팔조의 금관악기로 연주된다.


4악장  알레그로 아사이

"환희에부침"에 의한 칸타타이다.처음이 서주부이며 기악에 의한 레치타티보와 주제로 제시로 되어있다. 인간은 많은 투쟁을 경험하고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뒷받침하듯이 여기서는  기괴한 소음으로 시작한다. 음악은 점차 위력을 나타낸다. D단조의 3/4박자 서주에 뒤이어 레치타티보로(Nein)이라 고함치고 다시금 베이스는(Nein)으로 대답한다.

환희의 테마가 D장조 4/4박자로 나타난 뒤 "오! 벗이여, 곡조르 바꾸어 우리들은 더욱 즐거운 더욱 기쁨에 찬 노래를 부르지 않으려는가!" 이렇게 바리톤이 노래하는데 이것은 쉴러의 시가 아니라 베토벤 자신이 붙인 가사이다. 그 후 쉴러의 시로 노래하는데 "환희여 아름다운 산들과 같이 찬란한 낙원의 처녀여 우리를 불꽃처럼 취하여 황혼에서 그대의 하늘과도 같은 성역에 발을 딛노라.(이하생략)"
마지막에는 "둥글게 뭉쳐라, 황금의 술에 맹세를 걸어라. 충실은 그대의 영원한 약동, 저 하늘의 아버지께 바치나이다."
이같이 인생을 긍정하는 기쁨의 세계관을 고조하는 클라이맥스로 끝난다.그의 음악이 한걸음 전진하면 아무래도 성악적인 것으로 된다. 말하자면 음향만으로는 충분한 뜻을 나타내지 못할 심사인 것 같다.
이 교향곡의 궁극적인 숭고한 면은 4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Sir Georg Solti 게오르그 솔티

1912년 헝가리 부타페스트에서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나지움에서 교육을 받고 부다페스트 음악원에 입학하여 도흐나니, 코다이, 바르톡, 바이너등에게 피아노 지휘법과 작곡을 배웠다. 12세때에는 부다페스트에서 피아노 콘서트를 여러번 가졌으며 18세때에 음악원을 졸업하면서 1933년 부타페스트 국립 가극장 전속 지휘자로, 1937년에는 짤츠부르크 음악제에 참가하여 토스카니니의 부지휘를 맡았다.

1938년, 세계 2차대전 발발로 스위스로 망명한 솔티경은 피아노를 다시 공부하였다. 1942년에는 제네바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였지만 피아니스트로 공식 데뷔무대는 가지지 않았고 1946년에는 뮌헨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를 다시 지휘를 하게 되었다. 이 공연의 큰 성공으로 그는 바이에른 국립 가극장 지휘자로 취임하게 되었고 이 후, 그는 뮌헨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음악 감독직도 역임하게 되었다.

1953년에는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에서 미국 데뷔무대를 가졌으며 이듬해, 라비니아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처음 지휘하였으며 1956년에는 시카고 리릭 오페라의 지휘를 하였다. 데커와의 50년 전속 계약을 맺은 솔티경은 1958년부터 세계 최초의 "니벨룽의 반지" 전곡 녹음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1965년 성공적으로 전곡녹음을 맞쳤으며 그의 가장 큰 업적으로 남아있다.

1961년 영국 코벤트 가든 런던 왕립 오페라 음악감독에 취임을 하여 향후 1971년까지 10년간 코벤트가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다. 이 업적이 인정되어 솔티경은 1972년 영국 시민권과 함께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부터 작위를 받았다.

1969년부터 솔티경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겸 9번째 상임지휘자에 취임하였다. 세계의 오페라 극장에서 오페라 지휘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던 솔티경은 시카고 오케스트라 취임한 것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인 콘서트 전문 지휘자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으며 특히, "말러-솔티-시카고" 라인업을 만들정도로 자신의 정열을 말러 연주에 쏟아 부으며 1970년대에 세계적인 말러 선풍을 일으키는데 주역으로 그리고 세계 최초의 말러 교향곡 전곡녹음이라는 위업도 달성하였다.

1972년에는 파리 오케스트라(L'Orchestre de Paris)의 음악감독으로 선임되었으며 1979년에는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였고 1983년에는 명예 지휘자로 추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옥스퍼드 대학교와 하버드 대학교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받는등 많은 명예칭호를 받았다.

1991년 카라얀과 번스타인의 잇달은 죽음으로 솔티경은 돌연 은퇴를 선언하였으며 시카고 심포니는 그를 계관지휘자로 추대했다. 1992년부터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을 이끌며 20세기 남은 마지막 거장 지휘자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주었다. 하지만 1997년 9월 5일 프랑스 남부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솔티경은 죽음을 맞이하였고 그의 스승 바르톡의 묘옆에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