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음악에 대해 접근하면 할수록 새삼 느끼게 되는 일들 중 하나는 이 분야에 유독 천재도 많고, 선천적 혹은 후천적 장애로 인해 기구한 삶을 살았지만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이 말에는 얼마나 많은 고통의 냄새가 묻어나는가?)시켰던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그랬고(청력상실), 자클린느 뒤프레(다중경화증), 오토 클렘페러(워낙 사고 종류가 많아서 한 마디로 어떤 치명적 사고라고 말하기 어려운 지휘자) 역시 그랬다. 지금부터 말하고자 하는 클라라 하스킬의 예술적 생애 역시 그러하다. 솔직히 하스킬의 연주를 듣고 있노라면 어린 소녀의 수줍음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녀의 연주에서는 프로 연주자의 강박같은 것이 없다. 대신 그녀의 연주에서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딜레탕티즘이 느껴지곤 한다.(순전히 개인적인 사견이므로 오해 없으시길.) 천의무봉한 연주라는 격찬을 받는 그녀의 연주를 아마추어 애호가의 연주와 빗대는 것은 아니나 하스킬의 연주는 듣는다기보다는 즐기게 된다는 것이 맞는 말이다. 아무리 격렬한 음악도 그녀의 손아귀에서는 한없이 부드럽게 흘러나온다. 그녀의 신산한 삶에 비하면 그녀의 음악은 막 바닷가에서 건져올린 싱싱한 해물의 비릿한 냄새 같은 것이 묻어나는 것 같다.
신비평(New criticism)은 문학을 실증주의적이거나 비평가 개인의 감상, 역사, 사회적 배경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었다는 점에서는 높이 평가하지만, 작품과 작가를 별개의 것으로 떼어놓게 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점에서 클라라 하스킬의 연주도 그녀의 연주만으로 하스킬의 일생을 미루어 짐작하거나 그녀의 인생 따위는 알 바가 아니라는 사람들은 그녀의 연주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그녀의 인생에 대해서 알게 된 후로 그녀의 연주가 단순히 천의무봉한 테크니션의 그것이 아니라 고통 속에서 승화된 성녀의 연주로 들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몽환적 아름다움을 겸비한 천재 소녀
하스킬을 소개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따라다니는 에피소드는 그녀의 천재성에 관한 것들이다. 가령 그녀의 나이 여섯 살 때 하스킬은 모차르트 소나타의 한 악장을 단 한 번 듣고, 그 자리에서 그대로 따라 쳤다고 한다. 물론 악보를 전혀 알지 못하던 때의 이야기이다. 그뿐이 아니라 그녀는 그 악장 전체를 다른 조로 바꾸어서 연주했다. 이야기가 이쯤 되면 그녀의 천재성에 대해 뭐라고 더이상 말할 것이 없을 것 같다. 그 자신도 천재 중 하나라고 분류되곤 하는 찰리 채플린은 하스킬을 만나고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살면서 진정 천재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을 세 명 만났다. 한 사람은 아인슈타인이었으며, 한 사람은 처칠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누구보다도 현격히 차이나는 두뇌의 소유자는, 바로 클라라 하스킬이었다."
하스킬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하스킬이 만약 20세기 초엽의 사람이 아니라 지금 현재의 연주자로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면 아마도 그녀의 음반은 플래티넘은 우습게 넘기지 않았을까? 그러나 신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소유하도록 하지 않는다.
하스킬은 18세(1913년)에 발병하여 숨지던 그날(1960년)까지 일생동안 병마와 전쟁, 고독과 싸우며 살아야 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을 하루아침에 빼앗아간 병은‘세포경화증’(Sclerosis)이라는, 뼈와 근육이 붙거나 세포끼리 붙어 버리는 불치의 병이었다. 그녀는 이후 4년간 몸에 깁스를 댄 채 살아야 했으며 당연히 연주도 할 수 없었다. 한창 꽃다운 나이에 피아니스트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해야 할 시기에 그녀는 온몸에 깁스를 댄 채 누워있어야 했다. 불행한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이 병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아름다움을 잃어 버렸다. 마치 저주에 걸린 공주처럼 그녀의 아름다움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렸고, 그녀는 꼽추가 되어 버렸다. 20대의 나이에 그녀는 젊음과 아름다움을 모두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나 병마와 싸워 일어난 그녀는 다시 연주활동을 시작했고, 다시 예전의 인기와 명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이런 행복도 잠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그녀는 유태인이었다. 나치가 파리를 점령하자 그녀는 남프랑스의 마르세유로 피신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극도의 공포와 피곤으로 인한 뇌졸증을 일으켰다. 실명의 위기에 부닥쳤으며 각종 신경계에도 종양이 생겨 수술을 받지 않으면 살아나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유명한 유태계 의사가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달려왔고, 어려운 수술을 통해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하스킬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한 번 돌아섰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기는 했으나 그녀는 전쟁 기간 동안 마르세유 근교에 숨어 지내야 했다. 당시 그녀에게는 바이올린 한 대와 고양이 한 마리가 전부였다.
일찍 부모를 잃고, 오랫동안 병마와 전쟁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했던 클라라 하스킬의 친구는 고양이었다
하스킬의 연주와 죽음
하스킬은 평생을 고독과 싸워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고집세고 편협한 사람은 아니었던 듯 하다. 그녀를 기억하는 많은 당대의 연주자들이 그녀에 대해서 경외의 마음으로 바라본 데에는 그녀의 한없는 겸손함과 인격에서 비롯된 바가 크기 때문이다. 하스킬은 일찍부터 일류 음악가들과 활동했음에도 불구하고 레코드 녹음은 1947년 그의 나이 52세에 이르러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하스킬의 음악은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순수였고, 그녀의 연주는 명징했으며 아름다웠다. 어떤 꾸밈이나 과장없이 다만 마음을 다해 연주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감동을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러시아 피아노계의 대모’ 타티아나 니콜라예바가 처음으로 잘츠부르크를 방문한 때의 일이었다. 떠나기 전 러시아의 음악인들은 니콜라예바에게 “서방에 가거든 카라얀이란 지휘자의 콘서트에 꼭 가보도록 해. 그는 새로운 토스카니니로 알려져 있어”라고 조언했다. 때마침 잘츠부르크에서 카라얀의 모차르트 연주회가 있어 이에 참석했다. 당시의 협연자가 클라라 하스킬이었지만 니콜라예바로선 그녀가 어떤 인물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시 러시아 피아노의 거장이 토로한 하스킬에 대한 감동을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그녀의 몸은 뒤틀려 있었고, 잿빛 머리카락은 온통 헝클어져 있었다. 마치 마녀처럼 보였다. 그러나 막상 공연이 시작되자 카라얀의 존재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녀가 건반으로 손을 옮기자 곧 나의 볼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실로 내가 평생 동안 들은 최고의 모차르트 전문가였다. 그녀의 마력은 너무나 강력해 오케스트라의 총주가 다시 울려퍼질 땐 모든 것이 변해 있었다. 풍부하면서도 자연스런 음이 오케스트라로 전달되어 지휘자마저 마술에 걸려 있었다. 그녀 덕택에 그들 모두는 음악적 진실을 접하고 있는 것이었다. 결국 이것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콘서트가 되었다.”
프랑스 파리 몽파르나스에 있는 클라라 하스킬의 쿠덤
말년에 이르러 하스킬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나는 행운아였습니다. 나는 항상 벼랑의 모서리에 서 있었어요. 그러나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인해 한 번도 벼랑 속으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 피할 수 있었다는 것, 그래요, 그것은 신의 도우심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