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교향곡 5번 칼뵘
Symphonie No.5 en ut mineur Op.67
Karl Bohm
Wiener Philharmoniker
- 05-01. Symphonie Nr. 5 c-moll op. 67 - I. Allegro con brio
- 05-02. Symphonie Nr. 5 c-moll op. 67 - I. Allegro con brio
- 06-01. Symphonie Nr. 5 c-moll op. 67 - II. Andante con moto
- 06-02. Symphonie Nr. 5 c-moll op. 67 - II. Andante con moto
- 07. Symphonie Nr. 5 c-moll op. 67 - III. Allegro - attaca -
- 08-01. Symphonie Nr. 5 c-moll op. 67 - IV. Allegro
- 08-02. Symphonie Nr. 5 c-moll op. 67 - IV. Allegro
3. Allegro - attaca
Karl Böhm(28th Aug. 1894 ~ 14th Aug. 1981)
[ Honest and noble in music ]
Karl Böhm(young age)
20세기 후반에 카라얀과 같은 시대를 살면서 그의 인기에 필적할 수 있는 지휘자는 거의 없었다. 사실 루돌프 켐페, 오이겐 요훔, 존 바비롤리, 앙드레 클뤼탕스, 요제프 카일베르트 등은 예술적으로 보아 결코 카라얀에 뒤떨어진다고 말하기 힘든 초일급인데도, 카라얀에 인기에서 비길 수는 없다. 좋은 의미건 나쁜 의미건 간에 말이다.
하지만, 굳이 경쟁자를 한 명 들라고 하면 아무래도 칼 뵘을 꼽아야 할 것 같다. 예술성이나 녹음의 중량감이나, 레파토리 측면에서 카라얀과 견줄 만한 사람은 그 외에는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
그는 오스트리아 그라츠에서 태어났다. 음악을 좋아하는 가정에서 자랐지만 음악이 전공은 아니었다. 대학에서는 엉뚱하게 법학이 전공이었으며 후에 박사학위까지 받았다(아버지의 희망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기질은 말릴 수가 없었는지, 고향인 그라츠에서 리히테르처럼 코레페티터로 음악가의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 전통적인 독일의 지휘자들처럼 그도 지방의 오페라를 전전하면서 음악가로 성장하는데, '로엥그린'을 무대에 올렸다가 당시의 바그너 거장인 칼 무크(Karl Muck)의 눈에 들어 뮌헨으로 옮겼다. 여기서 18세 위인 브루노 발터(Bruno Walter)를 만나는데, 아직 젊었던 뵘은 그에게 배운 바가 컸다고 한다. 여기서 뵘은 33세 때에 17세의 소프라노 테아 린하르트(Thea Linhard)를 아내로 맞이한다. (상당한 도둑질이긴 하다.. ^^)
베를린 필과 녹음한 R.Strauss의 '차라투스트라' LP 표지. 음반 번호가 '136 001'인 데서 알 수 있듯이, DG 레이블로 발매된 최초의 스테레오 음반 중 하나다.
그 후 다름슈타트, 함부르크 등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던 그는 드레스덴 오페라로 옮겨 슈타츠카펠레(Staaskapelle)의 지휘를 맡았다. 거장 프리츠 부시(Fritz Busch)의 후임이었는데, 그가 나치를 반대해서 형제들과 함께 독일을 떠나 버리는 바람에 생긴 일이었다. 나치와 뵘의 관계는 좀 분명하지 않은 점이 있는데, 최소한 초기에는 뵘이 나치를 좋게 생각했음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나중까지 지속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어쨌건 1947년 1월 카라얀이나 푸르트뱅글러보다 몇 달 빨리 무죄 판결을 받은 점으로 보아 이 두 사람보다 혐의가 그다지 크게 취급받지는 않은 것 같다.
드레스덴에서 뵘은 첫 번째 전성기를 맞는데, 독일 Electrola(EMI의 독일 지사)와 본격적으로 녹음을 시작했다. 얼마 전만 해도 'Bohm in Dresden'이라는 LP 세 세트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LP 약 10여 장으로 정리된 상당한 양의 녹음 중에는 에트빈 피셔와 베토벤 '황제', 기제킹과 베토벤 협주곡 4번, 박하우스와 브람스 협주곡 2번 등 독일에 남아 있던 최정상의 예술가들과 협연한 것도 있다. 이렇게 화려했던 드레스덴 시대는 그가 1942년 빈 제국 오페라(현재 국립 오페라)로 떠나면서 끝나는데, 이 드레스덴이 1945년 초 연합군의 대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을 생각하면, 뵘이 드레스덴에 남아 있더라면 거기서 사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첫째 빈 시대는 상당한 양의 실황 녹음이 남아 있을 정도로 열심히 활동하나, 결국 연합군의 공습은 1945년 국립 오페라 하우스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결국 연합군이 빈을 점령하고, 뵘은 당분간 지휘를 금지받아 1947년 1월에 이르기까지 지휘대에 서지 못한다. 그가 빈 국립 오페라 포디움에 다시 선 때는 1955년 베토벤 '피델리오'로 재낙성식을 치를 때이다. 하지만 이 드레스덴과 첫째 빈 시대는 그에게 대단히 보람 있었던 시기인데, 리햐르트 슈트라우스와 친하게 지내면서 그의 많은 작품들을 연주하고, '말없는 여인', '다프네', 호른 협주곡 2번을 세계 초연했다. '다프네'는 그에게 헌정된 작품이다. 결국 죽을 때까지 R.슈트라우스의 권위자로 인정받았으며, DG에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을 녹음한다.
지휘 활동이 해금된 뒤 뵘은 월터 레그에게 기용되어 EMI를 위해 빈 필이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를 간헐적으로 지휘하다가, DG와 계약을 맺으면서 베를린 필을 지휘하여 모노랄 시대에 등장한다. 물론 그 동안에도 빈 필을 지휘하여 빈 필과 계약되어 있던 Decca에,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우나 빈 심퍼니를 지휘하여 Philips에 녹음을 진행했다. 일본에서는 빈 필을 지휘한 모노랄 시대의 Decca 녹음이 꾸준히 나왔던 모양인데, 굴다 협연의 베토벤 협주곡 1번, 박하우스 협연의 베토벤 협주곡 3번과 브람스 1번 협주곡, 브람스 교향곡 3번, 모차르트 교향곡 36번과 38번, 슈베르트 '미완성 교향곡'(Decca) 및 콘서트헤보우를 지휘한 '주피터'를 포함한 일련의 모차르트 교향곡들(Philips) 등은 아직까지도 정평이 있다. 이 시기의 녹음은 현재 본사 CD로는 거의 하나도 구할 수가 없다가 최근에 DG에서 Original Masters 시리즈 박스로 다시 내놓았다.
뵘은 좀 처신이 서툴렀는데, 빈 사람들의 뒷공론 좋아하는 기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서 빈 국립 오페라에서 재임 중 객원 지휘가 잦아 말이 많자 기자들에게 "나는 좀 더 자유롭게 지휘 활동을 하고 싶다"고 말해 결국에는 카라얀으로 교체되었다. 이건 사실 카라얀을 지지하던 사람들이 부추긴 면도 있다고 하는데, 하지만 뵘과 카라얀은 결코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다고 전한다. 그 후 뵘은 자유롭게 지휘 활동을 했으며, 빈 필에서 1970년 상임 요청이 들어왔을 때도 거부했다. 그러자 빈 필은 그에게 명예 지휘자 칭호를 주었고, 이 칭호는 그가 죽은 후 카라얀으로 계승되었다. 빈 필을 가장 많이 지휘한 사람 중 하나가 뵘임은 확실하다. 1981년 사망하기 직전까지 뵘은 빈 필을 계속 지휘했으니까. 뵘처럼 리허설에서 깐깐한 사람이 사실 빈 필하모닉의 자유로운 기풍에 잘 맞았을지 의문인데, 뵘을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하는 단원들 덕에 끝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뵘은 "다른 오케스트라는 악보에 나와 있는 것을 잘 표현하지만, 빈 필은 악보에 없는 것까지도 잘 표현한다"고 빈 필에 대해 말했을 정도로 빈 필을 좋아했다.
뵘이 녹음한 최고의 오페라 녹음 중 하나일, 슈바르츠코프, 루드비히, 크라우스, 타데이, 베리 등의 가수와 공연한 모차르트 '코지 판 투테'(EMI). 월터 레그와 그가 오랜만에 합작한 레코드로, 1962년 녹음된 이래 카탈로그에서 삭제된 일이 없다. 그가 녹음한 세 종류 이상의 스튜디오 및 실황 전곡 녹음 중 최고로 꼽힌다.
뵘의 음악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흔들림 없이 진행되는 힘 속에 겉치레 없는 소박함과 깔끔함을 느끼게 한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감상주의(sentimentalism)란 없다"고 말했다는데, 무뚝뚝함으로 가득한 베를린 필 연주 교향곡(DG)들을 들어 보면 실감이 난다. 물론 지금은 양식적으로 다소 낡은 느낌은 있지만. 핸델에서부터 베르크까지 넓은 레파토리 안에서 이 정확성은 힘을 발휘했다. 아르투르 루빈슈타인(Artur Rubinstein)은 그에 대해 "뵘은 좋아해요. 그가 만드는 음악은 순수 바로 그것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뵘 자신은 죽기 불과 몇 주 전 "어려움도 많았지만, 나는 항상 음악에서는 정직하고 고귀했다"고 회상했다고 한다.
스테레오 시대가 되면서, 뵘은 R.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DG, 베를린 필)을 기점으로 DG에 방대한 양의 녹음을 시작한다. 지금은 양식이 다소 낡았지만 베를린 필과 모차르트와 슈베르트의 교향곡 전집, 빈 필이 Decca와 전속 계약을 끝내자 빈 필과 베토벤과 브람스의 교향곡 전집(DG), 브루크너 교향곡 3,4번(Decca, 빈 필), 7,8번(DG, 빈 필),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6번(런던 심포니, DG), 박하우스와 모차르트 27번과 브람스 협주곡 2번(Decca, 빈 필), 길렐스 부녀와 모차르트 27번, 10번(DG, 빈 필), 모차르트 클라리넷과 버순 협주곡, 플루트 협주곡과 플루트와 하프를 위한 협주곡, 호른 협주곡 4곡(DG), 모차르트 후기 교향곡 재녹음(DG, 빈 필) , 하이든 교향곡 88~92번과 협주 교향곡(DG, 빈 필)등 콘서트 레파토리가 대충 떠오른 것만 들어도 이 정도이다. 박하우스와 협연한 2곡은 CD 한 장으로 간편하게 구할 수 있는 정평 있는 연주고, 브루크너 3,4번이 특히 잘 된 연주와 녹음으로 유명하다. 브람스 전집도 가격이 싸고 좋은 연주니까 역시... 베를린 필 및 드레스덴 슈타츠카펠레와 녹음한 R.슈트라우스 교향시집(DG)도 작곡가의 직계 답게 내용이 좋다. 지금 빈 필과 녹음한 '영웅의 생애'(DG)가 CD로 나오지 않은 점이 아쉽다. 베를린 필과 스테레오 초기에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3,7번, 브람스 1번(DG)은 초일류급으로 평가받는다. 성악곡은 전반적으로 수가 많지 않은데, 2종을 볼 수 있는 모차르트 레퀴엠의 신반(DG, 빈 필)은 그야말로 느린 템포의 장엄한 연주로 녹음 후 30년 이상 지난 지금까지 유명하다. 그 외에 루드비히가 부른 브람스 '알토 랩소디'(DG, 빈 필)와 베토벤 장엄 미사(DG, 빈 필)도 정평이 있다. 그 외에 폴리니와 협연한 협주곡 베토벤 3~5번, 모차르트 19,23번, 브람스 1번은 모두 빈 필을 지휘했다(DG).
2차 대전 후 바이로이트 최고의 명작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인 1966년 실황의 '트리스탄과 이졸데'(DG). 아마 푸르트뱅글러 지휘의 1951년 베토벤 교향곡 9번에 비길 수 있는 유일한 바이로이트의 녹음일 것이다.
오페라 녹음도 매우 많다. 모차르트는 거의 유명한 모든 레파토리가 다 있는데, '극장 지배인' 이후의 모든 오페라를 다 녹음한 사람은 뵘이 사실상 최초다. 이 중 가장 정평이 있는 것은 '코지 판 투테'로, Decca(빈 필, 스튜디오), EMI(필하모니아, 스튜디오), DG(빈 필, 잘츠부르크 실황)의 세 개가 팔리고 있는데 EMI의 것이 가장 유명하다. 그 다음으로는 '피가로의 결혼'이다. 모노랄 시대 말기의 Philips 녹음과 1968년 DG 녹음이 있는데, 후자는 화려한 가수진으로 이름이 나 있고, 지금 오리지날스 시리즈로 구할 수 있다. '마술 피리'(DG)는 남성 가수들에 비해 여성 주역이 격차가 현저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값도 저렴하고, 프리츠 분덜리히의 타미노 역은 아직까지 넘보기 힘든 경지다. '돈 조반니'는 빈 필의 후기 실황과 프라하 국립 오페라의 스튜디오 녹음(모두 DG)이 차가 꽤 크다는데, 어느 편이 좋은지는 평가가 엇갈린다. 베토벤 '피델리오'(DG)는 드레스덴의 녹음으로, 긴장감이 넘친다. 간신히 얼마 전에야 본사에서 CD로 발매했다.
특히 최고의 걸작은 바그너의 세 실황 녹음으로, 1960~70년대 전성기의 바이로이트 공연을 잡았다. 1966년의 트리스탄과 이졸데(DG), 1966~67년의 '반지'(Philips), 1971년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DG)은 빠른 템포 속에서 압도적인 바그너의 힘을 경험할 수 있는데다 가수들도 당시 최고급(아마 지금까지도 최고급)이다. 이 외에는 R.슈트라우스의 오페라 녹음이 '살로메' 이후의 거의 전 작품을 망라하는데, 아쉽게도 지금 DG에서 발매한 CD들에는 스튜디오 녹음과 실황(상당수 모노랄)이 섞여 있다. 드레스덴과 1958년 녹음한 '장미의 기사'가 오리지날스 시리즈로 재발매되었다.
뵘이 자주 지휘했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의 말이다. "진짜 지킬과 하이드... 무대에서는 실수도 안 봐주고, 화 잘 내는 폭군이지만 지휘대를 내려오면 아버지 같다. 둘이 같은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리허설에서는 실수한 단원에게 핀잔을 준다는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그도 유머를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일본 공연 후 일식집에서 저녁을 먹었는데, 일식에 포크가 나왔을 리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뵘도 젓가락을 써야 했는데, 쉬웠을 리가 있었을까? 한참을 시도해도 음식을 먹을 수 없었던 그,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막대기 하나로는 돈도 잘 벌리는데, 막대기 두 개로는 굶어죽겠군"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글 이영록의 음악페이지 http://fischer.hosting.paran.com/music/music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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