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12. 21. 23:43

브루크너 교향곡 8번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전곡감상>



BRUCKNER Symphony No.8

I. Allegro moderato

II. Scherzo. Allegro moderato - Trio. Langsam

III. Adagio. Feierlich langsam; doch nicht schleppend

IV. Finale. Feierlich, nicht schnell



Wiener Philharmoniker

Carlo Maria Giulini


 

사용자 삽입 이미지
브루크너에게 있어서,  8번 교향곡의 작곡은  거의 항상 길고, 복잡하고, 혼돈스러운 과정이었다.  많은 부분, 이것은 그의 예술적인  완벽함에  대한 그의 이상주의적인  탐구 성향으로부터 초래되었는데, 그래서  많은  생각 후에 - 섹션과  심지어는 악장까지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것을 포함하여 - 이 작곡 과정은 창조적인  투쟁의 한 부분이 되었다. 또한 이러한 많은 생각 속에는 새로운 오케스트레이션과 텍스춰의 단순화 등을 포함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다른 압력이 있었다. 그 자신이 확 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그의 동료 음악가들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고는 했는데, 그 중에는 존경할만한 정신을 가지고 그 제안을  하지 않거나, 또는 그 중에는 다분히 의도적이기는 하나 지각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의 교향곡이  연주되는 것을 보기를 원했던 그는 변경과  삭제하는 것을  허용했으며, 심지어는 그것을 장려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매우 자신감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거부했을 정도의 것이었다.
8번  교향곡에 관하여 그는 기획된 음악회와 관련하여 이렇게  적고 있다. "제발 휘날레에 급진적인  커팅을 해달라, 지시된 대로.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충분할 정도로 길고, 후대에만 더욱  유효할 것이며, 특히 일단의 친구들과 감비평가들에게만 더욱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다음 편지 에서 그는 지휘자에게  다음과 같이 간청한다. '모든  것을 "당신의 오케스트라에 맞게" 편집하라,  그는 파트보를 고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실제적으로 연주되기를 원하는  실제적인 고려와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의구심은 완전히 혼합되어  그에게 매우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했다. 브루크너 자신은 작품의 이상적 상태가  무엇이었는지 실제로 알고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어떤 교향곡도  8번 교향곡처럼 상황이 왜곡되고,  브루크너에게 혼란을 주지는 않았다.  브루크너는 1884년의 여름에 1악장의 스케치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해는 '테데움'을 완성하였고,  라이프치히에서 니키쉬의 지휘로 교향곡 7번의 연주가 있었던 해였다. 그 당시는  7번 교향곡의 성공과 더불어 매우  행복한 시절이었는데, 그때는 그에 대한 일반  대중과 음악 평론가들의 긍정적인 이해와 수용이 확인되던 해였다.  1885년 2월 16일까지 그는 위대한 아다지오의 스케치를 끝냈고,  이어서 스케르초와 휘날레를 7월과 8월 사이에  끝냈다. 8월 28일, 즉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축제일에, 그는  새로운 작품의 주제를 갖고 공개적인 즉흥연주를  해보였다. 그런데 이는 바그너의  '신들의 황혼'에 나오는 모티프와 혼합되어 있다. 2년 여동안 그는 교향곡 작곡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았는데, 끊임없이 개정과 수정을 반복하였다.  그리고는 두번씩이나 스케르초를 '끝냈다'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1887년 9월 4일에  그는 뮌헨의 궁정악장인 헤르만  레비에게 '할렐루 야! 드디어 8번 교향곡은 완성되었고, 당연히  이 사실을 알아야 할 사람 은 나의 예술적 아버지이다. 은혜가 가득하기를!'라는  편지를 썼다. 그리 고는 2주 후에 스코어의 사본을 그에게 보냈다(9월 19일).
 
그러나 레비는 새로운 작품의 장대한 스케일과 다양성을 이해하기 어 려워했다. 이러한 반응이 브루크너에게 무엇을 의미할 지  알았기 때문에 그는 그들의 절친한  친구인 프란츠 샬크에게 이런 뜻을 전했다.  브루크너는 망연자실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는 후고 볼프의 경우처럼 다른  학파로부터의 공격이 없었고, 또한 무지한 이들의 몰이해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고 믿었던 사람에 의한 심각한 거부였던것이다. 그는 거의 신경  쇠약에 가까운 상태에 이르렀고, 1890년이 되서야 회복되어 그는 완전한 대규모의 개정에 착수하였다.  그는 스케르초의 트리오를 바꾸었고,  몇몇 아이디어를 바꾸었다(예를 들면  1악장의 마지막 fff를 pp로 바꾼  것). 많은 커팅을 했고, 스코어링을 개정하였다. 몇번씩이나 그는 그  일이 "끝났다"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1890년에 끝났다. 이것이 두번째  버전이다. 그러나 그는 곧 3번째 개정을  했는데,그것은 1892년에 출판되었다.
 
이렇게 혼돈스럽고  힘든 과정을 거쳐  완성된 제8번 c단조  교향곡은 브루크너가 할 수 있는 모든  역량과 정력을 투입했기 때문에 그 정신적 깊이라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심원하다. 브루크너  교향곡의 대부분이 다 그렇지만, 제8번에서  그는 최고의 봉우리에 도달하고 있다. 브루크너의 친구인  작곡가 볼프가 c 단조  교향곡을 가리켜 '정신적  깊이, 이와  풍부한 창작력의 위대성에  있어서 가히 거인적이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라고 극찬한 것이  결코 허세가 아님을 이 곡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제7번 교향곡의 성공 후에 자기 작품이 유명해지기를 바라는 불안과 걱정으로부터 이제는 벗어날 수  있었던 그는 또한 그 자신을 교향곡 속에서 다양한 부수적인 음악적 연상을 제안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지휘자 펠릭스 바인가르트너에게 보낸 1891년 1월 27일자 편지에서 브루크너는 세 악장에 대해서 상당히 자세한 표제 설명을 제공했던 것이다.  

1악장은 브루크너 개시, 즉 여전히 현의 트레몰로로 시작하는데, 특히 그는 1악장을  묘사하면서, 재현부의  클라이막스를 '죽음의 알림'이라고 보았다(1악장의 거의 마지막에 fff 트럼펫과  혼). 그리고 그는 코다를 '체념'이나 '조종'이나,  '죽음의 시계'라고 서술했다.  두 악절  모두 상당히 보기 드문 방법으로 꾸몄다. 재현부의 클라이막스에서는 주요  주제의 점선 같은 리듬을 계속해서 적어도  열 번이나 호른과 트럼펫이 함께 포르테시모로 따라가는  힘찬 악구가 나온다.  그런 다음에 피아니시모로  세차례의 북이 울리며 전체적으로 멈춤으로써 갑자기 끝난다.  그리고는 코다가 장송곡 비슷한 형식으로 주요 주제의 으뜸 모티브를 반복하고 조용히 사라진다.
 
브루크너가 이 악장의 영감을 리하르트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델란드인'에 나오는 아리아, 제1막에서  네델란드인의 c단조 아리아에서 얻어왔다는 사실을 알면  이해가 훨씬 쉬워진다. 교향곡의 주요 주제는  아리아의 주제와 놀랄 만큼 유사한데, 그 아리아의 내용은 브루크너  음악이 제자리를 찾으려고 추구하는 정신적 터전을 묘사한다. 바그너의  아리아 내용은 '심판의  날'과 '죽은 자의 부활'에  임하는 때 그를 기다리고  있을해방을 고대하는 네델란드인의 죽음에  대한 의지를 반영하는 반면에 브루크너는 '죽음의 알림'과 '체념'을 이야기한다.
 
조용히 끝난 후에 이어질 악장은 아다지오보다는 스케르초가 더욱 낫다고 브루크너는  생각하였다(그래서 개정 때  악장의 순서를 바꾸게  된다). 이 스케르초 악장은 비올라와 첼로가  이 교향곡의 주요 4개의 주제중에 두번째 주제를 연주하며 시작된다.
 
그런데 8번 교향곡의  스케르초 악장은 현대 역사에 입각하여 해석해야 한다. 브루크너는  이 악장이 소박하고 평범한 시민을 상징하는  대중적인 인물이었던 전통적인 '독일인 미헬'의 초상화로 이해되기를 바랐다.  19세기 동안 그 인물은 독일 제국의 건설과 더불어 생겨난  희망, 독일의 정치적 무기력함에 대한 실망, 세계 강국들 사이에서  지배권을 차지하려는 투쟁에서 패배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요약하고 상징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는 '독일인  미헬'이 국민에게 정치적 각성을 불어넣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브루크너의 말과 다른 암시들로  미루어보아 제 8번 교향곡의 스케르초와 트리오에서 그가  '독일인 미헬'의 영웅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몽롱하고 꿈에  젖은 면모도 묘사하려했던 의도가 확실 히 있었다. 브루크너의 동시대인들은 거기 등장하는 상징주의를  잘 알았고, 사실상 1892년에 화가 페리 베라톤은 브루크너를 '독일인 미헬'로 묘사하였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아다지오에 대해서 그는 별다른 묘사를 해놓고 있지는 않다. 이  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지어 주제적 재료의  숭고함과 위엄,  장대함, 그리고 엄격함을 넘어서  그러한 영감어린 건축물을 세우고, 그것을 모두  함께 묶고 있는 브루크너의 건설적인 힘까지  동시에 파악해야 한다.
 
브루크너가 전에 썼던 어떤 곡보다도 가장 위대한 곡 중의 하나인 아다지오는, 앞 악장에서 힘차게 움직였던  이 곡의 운동을 정지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거대한 명상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맥박치는 현의  모습 위에 바이올린이 세번째  중심 주제를 제시하고 있는데, 이 부분의  정묘함과 그 숭고함은 어떤  음악도 따라올 수 없다. 특히 이  아다지오 악장의 정수는 처음 제시되었던 주제의 악장 전체를 통해 흐르는 강박적인 집중으로의 지속적인 회귀인데,  이를 통해 오히려 우리는 그의 내부에  있는 숭고한 생각들을 탐색해볼  수 있으며, 그를 통해 그러한 그의  생각들이 얼마나 강렬하게 우리의 영혼을 강타하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이제 종악작은 점진적으로  진군해오는 4분 음표 위에 브라스가 브루크너의 중심적 주제  중에 4번째인 팡파레와 같은 코랄로 4악장을  연다. 이 악장은 브루크너의 다른  교향곡의 휘날레와 마찬가지로 일화적인 악장이다. 브루크너는 교향곡의  최후를 4개의 악장 모두의 주제가  동시에 울리는 페시지로 장식하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음악적  재료들은 당당하고 군대적인 아이디어를  더욱 경건하고 교회적인 재료, 그리고 또한  더욱 서정적이고, 표현적인 주제들을 함께 포함하고 있다.
 
브루크너는 또한 최종 악장에 관한 보다  자세한 설명도 제공했다. 그는 이 악장의 주요 주제를 오스트리아의 황제와 러시아 황제의 만남이라는 세계적인 사건과  관련지었다. 이 표제 주석에 있어서는 아무런  환상적 요소가 없고,  단만 트럼펫 팡파르가 특별히 두드러진 금관악기의  취주로 군대음악의 느낌을  전한다. 브루크너는 최종 악장에서 다른 두  악구에 '죽음의 행진'과 '엑스타시'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리고 세 번째 주제 집단에서 '죽음의 알림'의 리듬을 인용하기도 하는  화려한 행진곡 같은 부분이 뒤따른다.
 
이 곡은 개정된 제2고로 1892년 12월  8일 빈에서 초연되었는데, 당대의 명지휘자 한스 리히터가 지휘한 이날의 초연도 제7번에 못지 않은 대성공을 거두어  청중들의 열광은 연주회장을  떠나가게 했다. 이  초연의 성공은 브루크너의  만년을 더욱 축하해주었다. 빈에서의  첫 공연 이후, 제 8번  교향곡은 대부분 신문으로부터  '우리 시대  최고의 음악'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하지만  한슬릭은 변함없이 브루크너의 적으로  남아있었고, 전체적으로  볼 때 그 교향곡이  '어설프고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고 평했다.
 
이렇듯 브루크너  자신의 깊은 사고와  엄청난 산고를 통해 만들어진 이 8번 교향곡이야말로 그의 가장 위대한 명곡이며, 음악사상, 그리고 교향곡 사상 가장  위대한 교향곡임을 우리는 부정할 수 없으리라.  특히 3악장의 아다지오는 듣는 이로 하여금 무한한 침잠 속에 들게  하는데, 그 영혼적 깊이는 나와 같은 범인은 감히 파악할 수조차 없다.  다만 나같은 아마추어 감상자에게는 그의 음악을 들으며, 정신적, 육체적 평안과 해탈의 경지를 약간 느끼고 감동의 눈물을 한 방울 흘리는 것만이 허락된 것 이다.
 
                                       
-슈만과 클라라음악 동호회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