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는 그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어떤 정점을 나타내는 환희가 있다.
그런 것이 살아 있음의 역설이다. 그 환희는 살아있기에 찾아오지만 살아
있음을 완전히 망각할 때에야 찾아 온다. 그 환희, 살아 있음의 망각은 감흥의
불꽃 속에서 자아를 잊는 예술가에게 찾아온다. 달빛 속에서 번개처럼 앞질러
가는 살아 있는 먹이를 잡기 위해 늑대의 오래된 울음소리를 내며 앞장서서
달려가는 벅에게도 바로 그 환희가 찾아왔다. 그는 시간의 자궁 속으로 되돌아
가며 본성, 자신보다 더 깊은 본성의 일부, 그 심오함에서 나오는 울음소리를
냈다. 그는 순수하게 솟구치는 삶과 조수처럼 밀려드는 존재의 파도, 근육과
관절과 심줄 하나하나가 움직일 때 느껴지는 완벽한 기쁨에 압도당했다.
솟구치는 삶은 죽음을 제외한 모든 것이었는데, 맹렬히 불타오르며 움직임 속
에서만 자신을 드러냈고 별 아래, 움직이지 않는 죽은 물질의 표면 위로 환호
하면서 날았다.
권택영
1.문명과 야만성: 야성의 부름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는가. 무엇이 이 소설을 잭 런던의
최고 작품으로 만드는가. 주인공은 개이다. 개에 관한 이야기, 아니 개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인간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소설의 역사에서
개의 시점으로 인간을 서술한 장편은 흔치 않는데, 잭 런던은 '벅'이라는
개를 니체적 초인으로 그리고 있다. 문학이 갖춰야 할 모든 것을 보여주는
「야성의 부름」에는 소설적 감동과 재미가 배어 나온다.
우선 잘 짜인 플롯 속으로 들어가 보자. 벅은 문명 세계를 상징하는 밀러
판사의 집에서 곤봉과 송곳니가 지배하는 야성의 세계로 추락한다.
그는 한 단계씩 추락하면서 죽음의 직전에 이른다. 페로와 프랑수아가
주인이었던 정부의 특급 배달우편 썰매를 끌 때는 정의로운 주인 밑에서
단련받고 보람 있는 일을 한다. 그다음에는 황금을 찾는 사람들의 가족과
친지의 우편물을 배달하는 일을 하는데 벅은 단조롭고 고된 일로 완전히
녹초가 된다. 마지막에 개들은 헐값에 산 엉터리 주인은 가장 무능하고
허세뿐인 사람들로 썰매개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오직 벅만이 살아
남는다. 이렇듯 플롯은 하강을 거듭하면서 벅이 거의 죽음 직전까지 이르고
거기에 강한 의지로 저항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플롯은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상승한다. 그리고 이 부활과 사랑의 절정에서 다시 하강을
맞으며 작품이 끝난다. 손턴에 대한 사랑을 증명한 대가로 결국 손턴을 잃게
되는 절정에는 아이러니와 반전이 숨어 있다. 내기로 얻은 돈 때문에 손턴은
새로운 모험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은 결국 벅이 손턴을 잃고 야성의 세계로
돌아가게 만든다. 마지막에 벅이 야성의 부름에 응하면서도 문명의 산물인
손턴에 대한 사랑을 간직하고 추모하는 모습에 비극적 결말이 응축되어 있다.
하강과 상승 곡선이 방향을 바꿀 때마다 그에 맞는 극적 정당성이 암시된다.
치밀하게 서술되고 빈틈없이 잘 짜인 이 소설에는 극의 보편적 요소들도 있다.
우선 사랑을 발견하고 사랑의 비극을 그린 이야기로 읽어보자.
(1)사랑 이야기
벅은 온갖 시련을 겪고 용기와 의지와 능력으로 대장이 되었기에 새로운 주인
손턴과의 사랑을 누릴 수 있었다. 개와 인간의 사랑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에로스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은 문명의 산물이다.
관습과 제도 때문에 인간과 인간의 사랑에는 환상과 허위가 개입된다.
그러나 인간과 개, 손턴과 벅의 사랑은 관습이나 돈이나 제도의 지배를 받지
않는 가장 열정적이며 순수한 에로스의 극치이다.사랑이 은밀하고 저속하며
육체적인 상처를 남기는 것처럼 손턴은 벅에게 은밀한 욕설을 들려주고 벅은
손턴의 손에 이빨 자국을 내는 식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사랑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놀아 주는 것이다. 둘은 언어가 아니라 행동으로 마음을 읽고 그래서
오해가없다. 사랑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라는 주인의 명령에 벅이 그대로 하려는 것을 보면서 손턴의 친구들은
"무시무시하다"라고 말한다. 이처럼 다른 사람들과는 티끌만큼도 나눠 가질 수
없는 것이 에로스다.
사랑은 서로를 위해 베푸는 것, 서로의 생명을 지켜 주는 것이다. 벅이 손턴을
그토록 사랑한 것은 그가 가장 이상적인 주인이었기 때문이기도하지만 무엇보다
자기를 살려 주었기 때문이다.프로이드의 말처럼 사랑은 죽음 충동을 삶 충동으로
바꾸는 행위이다. 똑같이 벅도 물에 빠진 손턴을 목숨을 걸고 구출해 냈다. 아마
런던은 자신이 누리고 싶었던 이상적인 사랑을 벅을 통해 재현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벅과 손턴의 에로스도 문명 세계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문명은 모험심이 강한 사람들에게 증명을 요구한다. 문명 세계에서 허구가 개입
된 사랑은 증명을 요구받는다. 자칫 이 요구는 순간적으로 정도를 넘어서 서로를
죽게 만들기도 한다. 삶 충동은 죽음 충동과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리비도이기
때문이다.
손턴은 벅의 능력을 사랑의 힘으로 증명하고 싶었고 벅은 그것을 증명한다.
그러나 이 감동적인 사랑의 승리는 이별의 불씨를 낳는다. 내기에 이겨 돈이
생기자 손턴은 미지의 세계로 모험을 떠나고 그 모험은 그의 목숨을 앗아 간다.
벅 역시 주인이 금을 얻고 할 일이 없어지자 야성의 부름에 이끌린다. 그리고 둘은
영원히 세상을 달리한다. 이 소설에서 돈은 에로스를 가로막고 야성을 거스르는 문명
세계의 가장 큰 허상이다. 자크 라캉이 말했듯이 돈과 언어는 문명 세계에서 가장
절대적이면서도 그렇기에 가장 허구적인 텅 빈 초월 기표이다.
(2)초인의 자격
상상력
문명은 야만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과 언어를 통해 문화를 창조하고 이성을 중시한다.
그런데 이런 합리성은 원래 의도대로 되지않고 여전히 불평등과 폭력에 노출된다.
문명은 불안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다윈의 '적자생존'이라는 원시 논리가
여전히 문명 세계를 지배한다. 벅은 밀러 판사 댁이라는 세련된 귀족 세계를 떠나
극지방이라는 곤봉과 송곳니의 세계로 들어간다. 약자와 여성을 보호하는 문명세계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가 오직 자신의 힘에 달린 원시 세계로 입문한다. 약하거나 비굴하면
보호받거나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잡아먹힌다. 무조건 강해야 하고 정확한 판단력이 있어야
불의에 저항하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곤봉의 논리를 재빨리 터득한 벅은 동료 개들 가운데서 살아남을 뿐 아니라 대장까지 된다.
그 길은 험난하다. 무조건 힘만 세서는 안 되고 상황을 판단하고 그에 재빨리 대처하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비굴해서도 안 되지만 무모하게 대들어서도 안 된다. 그가 일인자
자리를 놓고 스피츠와 대결하는 모습에서는 니체적 힘(혹은 권력)의 의지가 드러난다. 틈틈히
비열하게 습격하는 스피츠는 냉철하고 계산적이다. 반면 벅은 열정적이며 결정적인 순간에
계산이 아닌 전략을 펼 줄 안다. 입맛을 다시는 사나운 개 떼에 둘러싸여 둘이 격전을 펼치는
긴장된 순간, 불리한 위치에 잇던 벅은 차가운 계산이 아닌 창의력으로 적을 패배시킨다.
그러나 벅에게는 위대한 대장이 될 수 있는 기질이 있었다.그것은
창의력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도 싸울 수 있었으나 또한 머리로도
싸울 수 있었다. 그는 어깨 충돌 작전을 다시 시도하는 듯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몸을 눈 속에 파묻듯 납작 수그렸다. 그의 이빨이 스피츠의 왼쪽
앞발에 가 닿았다.
스피츠는 비열하게 습격하고 벅은 그것을 당당하게 물리친다. 전자가 라이벌을 두려워하여
제거하려 한다면 후자는 머리를 써서 그와 대결한다.런던은 이것을 상상력(imagination)
이라고 표현한다. 이는 런던의 모든 문학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이다. 인간의 몸은 자연의 일부
지만 그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지닐 때 초인이 된다.몸은 뱀이지만 머리느 독수리이다.
이것이 니체가 말한 차라투스트라의 초인적 힘이다. 힘은 반드시 상상력과 함께해야 한다.
단편 ' 불을 지피다'에서 주인공이 불을 피우지 못하고 추위에 지는 세 가지 이유 중 하나는
그에게 단순한 수학적 계산을 하는 머리만 있고 그것을 넘어서는 상상력이 없기 때문이다.
친구 혹은 사랑
초인이 되기 위한 두 번째 조건은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사회적 소통능력이다. 단편 '불을 지피다'
에서 주인공은 추위에서 살아남으려면 반드시 친구와 함께 가라느 선임의 충고를 무시한다.그가
나무 밑에서 불을 피우는 실수를 하고 몸이 얼어붙어 더 이상 불을 피우지 못할 때 옆에 친구가
있었다면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마르크스의 애독자였던 런던의 초인 정신은 언제나
사회적 협동이나 이상적인 팀워크와 연결된다.이상적 노동의 조건은 무엇인가. '야성의 부름'
에서는 개 열두마리가 공정한 주인을 만나 하나의 끈에 묶여 한 마리처럼 달리는 것이다.
이 부분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 벅이 스피츠와 싸워 이겼을 때 그는 당연히 대장 자리를 요구한다.
그것을 부정하려던 프랑수아에게 저항하는 벅의 용기와, 그 자리를 차지했을때 그가 보여주는 준엄한
힘 혹은 능력은 바로 사회가 본받아야 하는 곤봉과 송곳니의 질서이다. 원시 세계는 힘과 그에 맞는 정
당한 대우와 준법정신을 요구한다. 첫단추를 잘못 끼우면 그다음 질서도 엉망이 되기에 벅은 강렬히
저항해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가. 자신 없고 두려워서 스피츠처럼 비열하게
대장 자리를 차지하려는 사람은 없는가. 런던은 썰매 끌기에서 이상적인 팀워크를 보여 주고 인간들의
질서에 대해서도 반성케 한다.
이상적인 팀워크란 모든 사람이 공평한 대우를 받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혼돈이다.각자 능력에 따라
위치가 정해진다. 대장에게는 그만한 자격이 있어야 하고 그 보다 약한 개에게는 자기자리가 있다.
일단 서열이 정해지면 대원들은 대장의 명령체계에 따라 움직인다.이것이 열두 마리가 한 마리처럼
달려서 능률을 최고로 올릴 수 있는 조건이다. 자유는 능력에 따라 서열이 공정하게 정해지고 각자 자신
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그 일에 자긍심을 가질 때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다. 아첨도 뇌물도
없고 반대로 무시도 없다. 데이브가 병들어 죽어 가면서도 자신의 일과 이별하지 못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가슴 아파한다. 대원들이 각자능력에 맞게 자리매김을 하려면 그만한 능력이 있는 대장이 필요하다.
이것이 런던의 초인이다.
벅은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 상상력, 부당한 대우에 대한 저항, 앞날에 대한 정확한 예견 능력을 지녔다.
얼음이 깨지는 강바닥으로 끌려들기를 거부하고, 죽기 직전까지 곤봉에 맞아 가면서도 끝까지 버티는 벅의
모습은 숭고하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인 벅에게 주인공의 인격을 부여한다. 그는 런던이 원하는 인간형이다.
야성에 바탕을 두고상상력과 사회적 정의를 실천 하려는 의지의 초인이다.
벅은 돈에 대한 인간의 사랑 때문에 손턴과의 사랑을 잃고 야성의 부름에 응하게 되었다. 황금을 찾아 알래스카로
몰려든 사람들이 손턴에게 내기를 걸어 벅을 승리하게 만들고, 그 대가로 돈을 번 손턴 일행은 더 질 좋은 황금이
있다는 미지의 세계로 떠난다. 사실 손턴은 모험을 좋아하고 돈 자체보다 자연에서의 삶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교육과 단련
초인의 마지막 조건은 고통에서 뭔가를 반드시 배울 수 있는 단련의 의지이다. 벅이 훗날 대장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곤봉과 송곳니의 법칙을 배우고 눈 속에 잠자리를 만드는 법을 배우고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 원시의 법칙을
배우는 의지 때문이다.런던의 삶과 작품 세계를 지배하는 모험 정신은 반드시 체험을 통해 뭔가를 배우고
선임의 조언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확장해 나가는 변화를 가져온다. 단편 '불을 지피다'에서 신참인 주인공
은 죽느 순간에 자신이 선임의 말을 듣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세상 곳곳을 체험하고 선배들의 책을 탐욕스럽게 읽어서 이 둘을 녹여 내는 런던은
그 자신이 초인이었는지 모른다. 대장은 모험을 통한 단련의 고통을 거쳐서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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