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문제 2 : 무엇을 얼마만큼 가르쳐야 할것인가?
Everybody's political what's what?
앞장에서 대학졸업장을 딴 사람들을 '배운사람들'로 간주했다. 그렇다면, 부모가 대학등록금을
대주지 못했거나 십대에 학업을 마치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던 말단직원과 가계점원들,
그리고 초등교육은 물론 중류층의 태도와 습관, 용모를 익혀야하는 사무직 노동자들에게 붙여
줄다른 이름을 찾아야 한다. 이들을 '어중간하게 배운 사람들'이라고 하자. 어중간하게 배운 사람
들'에는 크게 두 부류가있다. 한 부류는 몰락귀족의 후손이고 다른 한 부류는 노동 계급 출신으로
출세한 사람들이다. 지주 계급의 작은 아들들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고 컸지만
정작 재산을 물려받지 못해서 차츰 몰락한 귀족이 되었다. 몰락귀족의 후손들은 '학비가 싼' 일반
사립학교에 '통학'하며 교육을 받는 부류가 되었다. 한편, 노동 계급 출신 중에 육체노동보다는
문학이나 수학에 소질을 보였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식이 커서 (제법) 잘 차려 입고 존경받기
를 바라는 어머니를 둔 덕분에 신분상승에 성공했고 '어중간하게 배운 사람들'에 속하게 되었다.
나 역시 나로서는 도저히 유지할 도리가 없는 사회적 체면을 지닌 몰락귀족이었다. 하여 나는 몰락
귀족의 손물근성과 궁핍함에 대해 날카롭게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돈이 되는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보기드문 경우라서, 직업적 명성을 얻게 되었고 속물근성과 가난을 탈피 할 수 있었다. 노
동계급 출신으로 신분상승에 성공한 사람들도 돈을 버는 재능, 특히 사업수완이 뛰어날 때 속물근
성과 가난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어중간하게 배운 사람들' 대부분은 부자가 될 만큼 비범한
돈 벌이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노동 계급에 속하지 않고 그렇다고 유한 계급에도 속하
지 않기 때문에, 지금 모습 그대로 가난하고 과시적이며 조직되지 못한 상태로 남는다. 따라서 그
들의 혼인 기회는 몹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배움도 어중간하고 혈통도 어중간한 사람
들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정을 이끌고 있는 것은 바로 '어중간하게 배운 사람들이다.' 게다가 셰익스피어
와 디킨스 버니언과 블레이크, 호가스와 터너, 퍼셀과 엘가, 그리고 버비지에서 배리 설리번에 이르
기까지 뛰어난 배우들을 비롯하여, 명성을 날린 상인과 군인과 법조인과 성직자들이 모두 '어중간하
게 배운 사람들'의 후손이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자. 스피노자와 루소가 있다. 그들은 서기나 교사나
그저 그런 작가가 되어 노예처럼 일하기보다 안경알을 까고 악보를 옮기면서 보다 현명하게 생계를
유지했다. 이쯤 되면, 어중간하게 교육을 받은 중류층의 경우에는 작업이나 경력이 재능에 따라 결
정 되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어느 계층에서든 천재는 결국 드러나기 마련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
확할 것이다. 그러나 가난과 무지는 천재성을 가로막고 질식시킨다. 통학생으로 낮에만 학교에 다니
는 중류층 소년은, 셰익스피어나 영국왕립미술원 원장까지는 아니더라도, 존 길핀처럼 유명하고 칭
송받는 시민이 되기를 꿈꾼다. 존 길핀의 심부름을 하던 소년이 나중에 커서 존길핀의 점원이나
집배원이 될지는 모르겠다. 중류층 아이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북적대는 집에서 자라지는 않는다.
중류층의 집에는 책과 피아노가 있고 그림도 몇 점 있다. 몇몇 중류층 아이들은 읽기와 쓰기도 수월
하게 익힌다. 이러한 아이들은 자기들이 배울 수 있고 배우고 싶어 하는 모든 지식을 선택해서 습득
할 수 있다. 학교수업시간에 한정되지 않고 (학교수업은 종종 자발적인 배움을 방해한다.) 평생 이런
과정이 지속 된다면, 중류층 아이들은 평균적인 대학졸업자보다 훨씬 나은 교육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의 교육이 반쪽짜리라고 해도 더 나은 반쪽인 것이다. 중류층이 가정교사의 수업료를 감당할 수
있다면, 그리고 소명의식과 예의범절을 갖춘 유능한 가정교사를 찾을 수만 있다면, 전문적인 가정교사
를 고용할 것이다.
중류층 아이들은 이튼을 거쳐 옥스퍼드대학에 보내거나 헤로를 거쳐 켐브리지대학에 보냄으로써, 존
길핀 대신에 레스터 데드록 경을 추앙하는 사립명문출신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교육 문제에 대한 해
결책이 아니다. 사실 존 길핀이나 레스터 데드록 경은 모두 훌륭하고 선한 인물들이지만, 둘 다 구시대
의 유물이다. 구엘프(교황)당과 가벨린(황제)당이 맞섰던 것처럼 부유한 상인 존 길핀은 봉건귀족 레
스터 경에게 반대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존 길핀이 다니는 통학학교는 지방 귀족들의 기숙학교를 그대
로 흉내내기 때문이다.
나야말로 '어중간하게 배운사람들'의 확실한 견본이라고 할 수 있으니까, 이쯤에서 내가 받은 학교교육
에 대해 한마디 거들어도 되지 싶다.
나의 학교교육은 여전히 라틴어를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며 교육의 완성이라는 가정 하에서 수행
되었다. 그러한 교육방침은 지극히 당연시되었다. 따라서 아무도 나에게 현재 통용되는 다른 언어 대신
에 라틴어를 배워야 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지 않았다. 사실상 라틴어를 배울 필요는 전혀 없었
다. 현재까지 읽힐 가치가 있는 모든 고전들에 대해서는 이미 수많은 번역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라틴
어 교육법은 야만스러웠다. 어형변화표를 줄줄 외지 못하면 회초리를 맞거나 방과후"나머지 공부"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나는격변화와 동사의 활용형과 어휘를 기계적으로 암기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란 손
쉽게 새로운 단어를 배우고 암기하는 데 익숙해지는 편이다. 내가 이런 것들을 해내자, 그 다음에는 카이
사르의 주해서와 베르길리우스의 유명한 서사시가 내손에 쥐어졌다. 오래된 고전 주해집이 나와 무슨 상
관이 있는지. 또는 아이네이스라는 고대 트로이 사람을 내가 왜 힘들여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역시 아
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나는 계관시인 드라이든에게 도전이라도 하듯 이 작품들의 번역문을 줄줄 읊어
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전과 마찬가지로 회초리를 맞거나 나머지 공부를 해야 했다. 나는 학교에
있는 반나절 동안에 늘, 심지어 벌을 받고 있지 않을때 조차도, 갇혀 있느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최악의
형벌 이었다. 운동장에서 보내는 30분 동안의 휴식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얌전하게 입을 다물고 집
중한 채 앉아있어야만 했다. 긴 시간 동안의 부자연스러운 구속에 대한 반발로, 나는 휴식시간 동안 미친
놈처럼 소리지르고 뛰어다니기 바빴다. 이 일은 끝이 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카이사르나 베르기리우스
를 암송하다 더듬거나 실수를 하면, 그리스어 어형변화표를 외우고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번역 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더비 경의 장엄한 영어 번역본으로 탐독한 뒤였다. 나
로서는 더비 경의 번역본이 예쁘게 압운을 맞춘 포프의 것보다 좋았다.
꼭 시어를 배워야만 했다면, 문화적으로 열등한 로마의 언어 대신 그리스어부터 배우면 안 될 이유가 무엇
인지 아무도 내게 설명을 해준적이 없다. 아마도 너무나 바보 같은 이유였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는 아직도
노르만 정복이 일어난 11세기에 머물러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까지도 나아가지 못햇다. 호메로스를 번역해
야 할 위협이 닥쳐왔을 때 나는 곧바로 고전주의 학교에서 도망쳤다. 학교를 떠나기 전에 대수학도 배웠지만,
역시 내 흥미를 돋을만한 설명은 단 한마디도 듣지 못했다. 셰익스피어와 디킨스처럼 나도 학교를 떠났다. 내
가 아는 것이라고는 약간의 라틴어와 그만도 못한 그리스어뿐이었다. 그마저도 학교에서 배운 것은 단지 죄수
가 동료 수감자들로부터 그리고 공포와 고통으로부터 배운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나로서는 차라리 배우지
않는 편이 나았다. 구속을 논외로 하면, 학교의 다른 특성들은 굳이 떠들어대야 할 만큼 중요한 사안들이 아니
기는 하다.
나는 기숙학교에는 들어간 적이 없고 낮에만 학교에 다니는 통학생이었음을 꼭 밝히고 넘어가야겠다. 따라서
자유시간에는 다정하고 온화한 부모님으로 부터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으며 지낼 수 있었다. 때로는 한 학교
에서 다른 학교로 옮기는 사이에 긴 자유시간이 주어지기도 했다. 나와 또래 소년들의 관계는 마치 갱단과 흡
사 했다. 아니, 실은 더 나빴다. 갱단은 필시 약탈을 목적으로 활동하겠지만,우리는 그저 장난 자체를 목적으로
활동하겠지만, 우리는 그저 장난 자체를 목적으로 무모한 행동을 일삼았으니 말이다. 학교선생들을 골탕 먹이려
고 공모한 것과 마찬가지로, 경찰이 놀려주려고 작당을 했었다. 만약 내가 길거리를 배회하고 다녔다면 틀림없이
경찰의 손에 넘겨졌을 것이다. 그러나 대체로 나는 혼자서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닐었고, 매혹적인 풍경의 마법에
곧잘 감동받곤 했다. 어쨌거나 1931년 러시아의 한 유형지를 방문했을 때 나는 한 무리의(어린 좀도둑이 대부분인)
비행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얘기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나
는 대단히 뛰어나고 "성공한" 사람이지만, 소년시절에는 경찰에 붙잡혔어야 마땅한 일들을 했었는데 그저 발각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언젠가 스코틀랜드 해안을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그 당시에도 나는 유명했고 세간의 인정을 받았으며 심지어 존경
을 받는 위치였다. 그때 나를 겨냥해서 여기저기서 돌팔매가 날아들었다. 머리에라도 맞는다면 크게 다칠 수 있을만
큼 무겁거나 날카로운 돌이었다. 어촌 혹은 탄광촌의 아이들이 놀고 있는 근처까지 온 것이었다. 이 아이들이 갖고 있
는 놀이의 개념이란 턱수염을 기른 낯선 노신사에게 돌을 던지며 상스럽게 털보라고 고함을 지르고 싸움을 거는 것이
었다. 이 아이들이 갖고 있는 놀이의 개념이란 턱수염을 기른 낯선 노신사에게 돌을 던지며 상스럽게 털보라고 고함
을 지르고 싸움을 거는 것이었다.
내가 줄행랑이라도 쳤으면 나를 공격하는 무리는 더욱 기세 등등해지고 몹시 신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어지간
히 놀란데다가, 재빨리 달아나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내가 내린 결론은 아이들이 나를 놀라게 한 것보
다 내가 아이들을 더 크게 놀려주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두려워할 것은 세 가지였다. 경찰, 부모들이
아이들의 행실을 바로 잡으려 할 때 사용하는 회초리, 그리고 내가 그들 중 누구라도 붙잡아서 볼기를 칠 가능성! 따
라서 나는 결연한 복수심을 품고 쏟아지는 돌팔매를 견디며 성큼성큼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이들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고, 다행히 나는 상처를 입지 않았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아이들이 제멋대로 놀도록 풀어놓는 것은 절대로
학교의 구속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없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인류 문명이 존속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이들이 가난하고 거칠고 야만적이라서 그렇게 행동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거의 같은 시각에
다른 곳에서도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다. 그 아이들보다 훨씬 나이가 많고 라틴어로 처방전을 쓸 정도로 교육을 받
았으며, 세련된 도시 문화를 향유하고 있고, 특별한 선의를 바탕으로 한 과학적인 직업을 위해 훈련을 받는 런던의 의
대생들이 그저 재미로 거리 한복판에서 미국의 금주개혁가를 공격해서 그의 한쪽 눈을 실명시키고 척추를 다치게 만
든 것이다. 그는 얼마 못 가 죽었다. 중등교육은 그 의대생들을 문명화하지 못했고 다만 야만화했을 뿐이다.
자, 만약 나에게 돌팔매질을 했던 스코틀랜드의 소년들이 보이스카우트로 조직되었더라면, 이천 년 전에 성 스테파노
에게 돌을 던질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이스카우트와 걸가이드는 유년기의 삶을 조직하려는 최초의 시
도들인데, 이러한 조직을 창단한 사람이 교육개혁가가 아니라 군인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작은 천사라며 아이
들을 숭배하느 박애주의자나, 아이들이란 의지를 꺽고 원죄에 대해 벌을 받아야 할 사악한 꼬마 녀석이라고 나쁘게 보
는 학교선생이나, 성인참정권 모든 현명한 정부의 토대인 것처럼 우상화하는 민주주의자만큼 해롭기는 마찬가지다.
어린아이든 성인이든 어디까지 지도와 강제를 필요로 하고, 얼마만큼 자유롭게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놔둬야 하는지 판단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아이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즉 문명화 된 삶에 적응하기
위해 배워야 할 것과 배우지 말아야 할 것을 혼자 힘으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사냥꾼이나 양치
기 혹은 동물조련사들이 개를 훈령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훈련한다면, 아이들은 현 상태 그대로의 문명을 효과적으로 대
리하고 고집스럽게 방어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일류보수주의자가 된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아이들이 발전을
주도하거나 옹호하지는 못할 것이다. '무엇이든 옳다'는 믿음에 길들여진 훌륭한 시민은 '무엇이든 잘못'으로 보는 파렴
치한 보헤미안만큼이나 대단히 골치 아픈 존재다. 이 양극단사이에서 적정선을 결정할 수 있는 절대적 행동규범은 존재
하지 않는다. 발전이란 변화를 의미하는데, 변화는 법과 질서를 전복시킨다. 변화와 질서는 균형을 이뤄야 한다. 헨리크
입센은 이 정당이 아니면 저 정당에 가입하라는 압력을 받으면 언제나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느 정당 소속도 아닙니다.
내 안에는 우파와 좌파가 모두 존재합니다. 나의 새로운 견해가 자유주의자, 보수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특히 노동
자와 여성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자유당이나 보수당이나 노동당이나 참정권 확
대론자라고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당규는 절대적 규범이 아닙니다. 절대적 규범 같은 것은 없습니다."
나는 입센과 같은 입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 이상의 정치적 사안에 대해 생각할 깜냥이 되는 사람들은 입센이 당
적을 갖지 않으려 하는 것에 공감할 것이다. 이들은 자기들의 견해가 실제로 어떻게 작용할 것인지에 대해 심사숙고를
거듭한다. 내가 어떤 문제를 검토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그 문제에서 양극단을 설정한다. 그리고 실행
불가능한 양극단 사이에 여러단계를 설정한 다음, 그 단계 중 어느점이 실행에 옮겼을 때 최적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아기의 목욕물 온도를 결정해야 하는 어머니라면 두 개의 정해진 한계점이 있다. 아기를 펄펄 끓는 물이나 얼음
처럼 찬 물에 담글 수는 없다. 그 양극단 사이에서 어머니는 시행착오를 거치게 된다. 어머니는 팔꿈치를 물에 담가 보면
서, 섭씨 38도 이상은 너무 뜨겁다는 것을 알아낼 것이다. 이처럼 제한된 범위 안에서는 아기를 효과적으로 목욕시킬 수
있다. 수백만 명의 아이들과 병사들의 목욕물을 준비해야 하는 정치인은 같은 문제에 맞닥뜨리게 된다.
그러나 정치인은 보다 복잡한 문제도 해결해야만 한다. 예를들면, 자유무역이냐 보호무역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극단적
인 보호무역주의 입장에서는, 국내생산이 해외생산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력이 들더라도, 국가가 모든 것을 자력으로 생
산해야 하고 완전히 자급자족해야 하며 국제무역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 극단적인 자유무역주의자는, 해외에서 더 싸게
생산할 수 있는 것은 절대로 국내에서 생산하면 안 되고 국내생산이 다른 곳에서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싼 재화에 특화해
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극단적인 생각들은 실행불가능하다. 나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어 보자. 나는 이 주제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이야기 할만한 입장이 된다. 극단적인 자유무역주의자의 원칙에 따르면, 나는 하루 종일 희곡을 쓰거나 구
술하는 일만 해야 한다. 내가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는 매 순간은 비애국적인 시간낭비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하루 중 몇
시간은 정원을 가꾸고 목공을 하면서 보낸다. 유명 정치인들이 골프를 치거나 나무를 베거나 벽돌을 쌓거나 그림을 그리
는 것처럼, 나 역시 스스로를 건전하고 사리분별 있는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다른 일들을 한다. 나느 직접 글을 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와 관련된 일들에도 관심을 쏟아야 한다. 내가 만약 완전히 전문화된다면, 내 희곡들은 점점 형편이없어질
테고 나는 아마도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요절할 것이다. 슬레이트공과 리벳공들이 못이나 기타 부속물들을 가지고 특정기
술을 사용하는 작업만 해야 하고 그 밖의 다른 일은 일절 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국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공장에서는
기계사용과(이따금 '합리화'라고도 부르는) "과학적 관리"를 통해 시간과 비용을 최대한으로 절감시킨 단순작업이 이뤄진
다. 이런 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은 얼마 못 가 다른 새로운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결국 그러한 단순작업은
그만둘 수밖에 없다. 임금을 조금 더 받겠다고 한 가지 작업만 반복하는 로봇 생활은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때가 온다.
이러한 측면에서 국가는 개인과 마찬가지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수 명 짧은 로봇으로 살면서 책이라도 한 줄 읽을라치
면 일분도 안돼 잠들어버리거나 정신병원에서 죽어갈 처지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전문적으로 숙련된 몇 가지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다소 서툴더라도 여러가지 일을 해야만 한다. 정치인은 철저한 자유무역주의를 주장해서도 안 되고,
완강한 보호무역주의를 고수해서도 안 된다. 사실상 다른 어떤 종류의 '주의'도 고수하지 않아야 하고, 랜슬롯
호그팬' 선생이 이름붙인 것처럼 '과학적 인본주의자'여야만 한다. 무역을 얼마만큼 보호해야 하고 얼마만큼 자유롭
게 풀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어머니들은 아기르 삶거나 얼리지 않으려면, 21도에서 38도 사이에서 아기의 목욕물
로 적당한 온도르 알아내야만 한다. 극작가들은 희곡을 아주 잘 써야 할 뿐만 아니라, 나처럼 몹시 서툴더라도 피아노를 쳐
한다.
학교교육이 처음 시행되기 시작했을 때, 자연스러운 교육과는 영 거리가 멀었다. 그때는 학자가 될 아이는 언제나 오로지 공
부에만 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게으름을 피우거나 집중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벌로 무자비한 매질을 가하는 것도
당연시되었다. 또한 아이들의 취햐이나 적성 또는 능력에 관게없이, 모든 아이가 일류 신학자, 철학자, 라틴어 시인이나 웅변가
가 될 수 있다고 여겨졌다. 라틴어에다 그리스어가 추가되고 또 그러다가 몹시 꺼려하는 데도 불구하고 수학까지 추가되면,
아이에게 호메로스, 플라톤 , 피타고라스,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베르길리우스, 뉴턴, 라이프니츠, 아인슈타인 모두를 합쳐
놓은 것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 모든 것을 살아있는 아이들에게 철저하게 실시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일만 하고 놀지 않으면 바보가 될 뿐이며, 개 꼬
리 삼년 묵힌다고 소 꼬리가 되는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학교교육을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으로 나누고, 전문교육과 교양교육
을 구분하며, 교과과정에 놀이와 운동을 포함시킨다. 그러나 부호계급과 그들이 따라 하는 중류층이 다니는 특급 사립명문학교에
서는 여전히 모든 학생을 '대단히 크라이튼'처럼 다재다능한 존재로 취급한다. 우리는 디킨스의<돔빙허 아들>을 읽으면서, 과로
로 학교에서 쓰러진 어린 돔비의 딱한 죽음에 눈물을 흘린다. 같은 학교에서 투츠가 겪는 비극은 그저 우스웠을 따름인데, 투츠의
비극에 대해서도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투츠는 부유했지만, 그를 고전학자이자 라틴어 시인으로 만들려는 몰
지각한 시도 때문에 마음이 피폐해진 불행한 소년이다. 투츠의 운명은 재능이나 적성과 거리는 멀엇다. 아이들이 당장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느 과목들이나, 아이들의 소망과 바람을 실현시키는 데 꼭 필요하지 않은 과목들을 억지로 가르치는 것은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심산에 상처를 내는 일이라는 것을 되풀이해서 강조하고 싶다. 주입식 공부를 한 어느 독일
학생이 내게 말하기를, 머릿속에 우겨 넣은 것들 중 5분의 3은 나중에 절대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따라서 학생이 배우고
자 하는 자연스런 충동이 없는데, 그렇다고 무식하게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다면, 우리는 간접적인 학습동기를 제공해야만 한다.
예를들면, 곱셈연산과 펜스테이블(환산표)을 몹시 싫어하는 아이가 있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어떤 대가를 치르러라
도 곱셈과 화폐변환을 머릿속에 억지로 쑤셔넣어야 한다. 만약 아이에게 펜스테이블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용돈을 주지 않을 것이며
그 대신 펜스테이블을 다 떼고 나면1실링을 주겠다고 약속한다면, 아이느 산수 때문에 상처를 받는 일 없이 펜스테이블을 숙지하는
데 몰두할 것이다. 탐험이나 바다를 동경하는 모험심 넘치는 소년에게 수학적 재능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비행기 조종사들이
그 자체로는 그다지 재미있다고 할 수 없느 모스 부호에 가까이 매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는 항해사의 자격을 갖추기 위
해 수학과 얼마든지 씨름할 것이다.
그렇다면 미래의 시민으로 자라날 우리 아이들은 무엇을 얼마만큼 배워야 할까? 물론 어설프게 배우는 것이 위험한 일이기는 하지
만, 그에 대한 해결책으로 "피에리아의 샘물을 맛볼 때까지 쭉 들이키라"고 권하는 것도 많은 경우에 적절치 못하다. 모든 시민이
제왕이 되기 위한 수업을 받는 왕국, 모든 보병이 육군원수가 될 자격을 갖춰야 하는 군대, 짐을 나르는 인부와 청소부까지도 고급
수학에 능통해야 하는 천문대 등등을 상상해 보면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자기가 맡은 일에 비해 지나치게 똑똑똑한 사람들은 자기소
임에 비해 터무니없이 멍청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무능하고 성가신 존재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어떠한 재능이나 능력도 훈련을
받지 못하거나 발휘될 기회를 찾지 못해 사장 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정치인이라면 폭넓은 배움의 기회를 만인에게 활짝 열어두는
일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누가 배우고 싶어 하고 누가 배울 능력이 되든지 간에, 그들에게 최대한의 교육기회를 열어둬야 한다.
그런데 정치인은 배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든 지식에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할 뿐만 아니라, 배우지 않으려고 갖은 수단을
동원하는 사람들도 일정한 지식은 습득하도록 해야 한다. 맨 아래가 일자무식이고 맨 위가 걸어다니는 백과사전이라고 할 때, 그
사이에 여러단계르 설정하고, 의무교육이 어느 지점부터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정해야만 한다. 자발적인 무지가 어느 지점부터 시
작되어야 하는지를 정해야만 한다.문명화된 사람이라면, 단지 인쇄된 벽보를 읽고 쓸 수 있어야 한다. 계산법을 익히고 돈을 셀
수 있어야 한다. 측정법과 계산법에 대해서 왠만큼은 알아야 한다. 왜 문명화된 인간은 훈육되어야 하는지, 왜 법과 규범이 필요
한지, 일상생활에서 무엇을 해도 좋고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를 알아야 한다. 은행업무를 이해해야 하고, 금리조건표와 아날로그
시계와 지도와 처도시간표와 참고서들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특별한 지위에 부합하는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로그와 이항정리
와 미적분을 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로그나 이항정리나 미적분은 상류층을 위한 교양 내지는 없어도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는 것들일 뿐이다. 그러나 문명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최소한의 지식은 분명히 존재한다. 따
라서 최소한의 지식을 얻는 것이 아무것도 배우지 않겠다고 주장하는 개인의 자유나 별난 개성보다는 우선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정부가 전혀 개입하지 않는다면, 우리느 야만적인 삶을 살게 되거나
악당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자유로운 영국인으로서 한없는 무지와 게으름을 피울 권리를 요구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나 자유는 우리 대부분을 예속상태에 빠뜨릴 뿐이다.
이 모든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중등교육은 자발적으로 이뤄져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중등교육이 정부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워야 한
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반드시 중고등학교에 다녀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더라도 중고등학교는 존재해야 한다.
또한 중등교육이 민간기업에 맡겨져서는 안 된다. 아이들을 소매치기로 양성하는 파긴의 사설학교 따위는 용인될 수 없다.
모든 학교의 교육활동은 공동체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옳은 것이어야 한다. 내가 이 책에서 제안한 대로, 자격이 검증된 후보자들
중에서우리의 통치자를 선출하게 된다면, 모종의 검증기관이 후보의 자격을 증명해야 할 것이다. 후보의 자격을 증명하는데 공립
학교 졸업장이 문제없이 받아들여진다면, 사립학교 졸업장도 정부의 면밀한 검증을 거쳐 가은 용도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파격적이고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없다. 오래된 교회의 의식을 몹시 적절하게 되살린 것뿐이다. 요즈음 민간영역에서 일자
리를 찾는 개인들은 대학입시자격시험을 치른 것이 주요 회사의 사무직을 얻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안다. 대학학위가 실업계에
필요한 지식이나 능력을 증명하는데는 아무 소용이 없지만(때로는 더 아 좋기까지 하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꼭 필요하다. 이제 아
주 고위급 공무원을 제외하면(국가원수나 장관들은 완전 무식쟁이일 수도 있으니까), 일반적으로 공무원으로 일하기 위해서는 시
험을 통과해야만 항다. 모든 정치활동에 대해 자격제도를 확장하는 것은 혁신이 아니다. 투표용지에 x표시만 그릴 수 있으면 누구
든지 선거권을 갖게 함으로서 민주주의를 이루려고 하는 무모한 시도가 가져온 끔찍한 결과를 상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해
야 할 방편인 것이다. 선덜랜드가 고안한 정당제도에 성인참정권이 접목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는, 1931년 혁명 이후
스페인 공화국의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고, 후기마르크스주의 살바도르 데 마다리아가의 저작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 교훈은
모든 실제적인 역사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서로 죽고 죽이기를 일삼다가 마침내 더 이상의 도륙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을때, 개인
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중지시켜 줄 국가만 있다면, 그 어떤 전제정치라도 따르겠다고 나서는 이들은 대책 없이 무식
하고 무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꼭 어중간하게 배운 사람들이 그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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