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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환상

프레젠토 2013. 11. 2. 18:41

잃어버린 환상

 

환상, 누구나 쫓지만 모두가 잡지는 못한다. 문인들을 보면 환상을 추구하여 여행을 떠나고 그 여행 속에서 느낀 바를 녹여내어 작품을 만든 경우가 많다. 바로 발자크 자신이 그런 환상여행의 주인공이다. 덕분에 여기서는 작가의 삶을 녹여낸 자전적 요소가 매우 많다.

그리고 출세작 <고리오 영감>과 닮은 듯 하면서도 여러 면에서 대조되는 작품이다. 서로 비교하면서 읽어 보는 재미도 컸다.

 

이 소설의 주인공 뤼시앙은 대단히 매력적인 청년이다. 탁월한 미모에 문학적 재능 또한 상당해서 프랑스 남부 소도시 앙굴렘의 귀부인을 매혹시켜 그녀와 파리로 도피여행을 떠나게 된다. 이때 그녀가 건네는 말이 정말 명언이라 아래에 인용해보겠다.

고통을 겪으세요, 고통을. 당신은 위대해질 겁니다. 당신의 괴로움은 당신의 불멸에 대한 대가구요. 투쟁의 고역을 견뎌보고 싶어요. 제발 당신의 삶이 무기력하고 파란도 없는 것이 아니었으면 해요. 그런 인생에는 천재의 날개가 활개칠 충분한 공간이 없거든요. 당신의 고통이 부러워요. 최소한 당신은 살아가고 있는 거니까요! 힘을 발휘하세요. 승리의 희망을 가지세요. 당신의 투쟁은 영광스러울 겁니다. 위대한 지성들이 자리하고 있는 왕좌에 오르게 되면 운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가엾은 사람들을 기억해주세요. 정신적 질소 가스의 압박 아래 지성이 절멸되고, 인생이 무엇인지는 항상 알아 놓고도 살아 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가엾은 사람들, 궤뚫는 눈을 가졌으면서도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후각은 섬세하면서도 역한 냄새를 풍기는 꽃들의 냄새밖에는 맡아 보지 못한 가엾은 사람들을. 때면 노래하세요. 리아나 칡덩굴과 탐욕스레 우거진 식물들에 졸리고, 햇빛의 사랑도 받아 보지못하고 어느 깊은 곳에서 시들다가 꽃도 피어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그루 나무를!
이것은 끔찍한 우울의 , 무척이나 환상적인 주제가 아니겠어요?”

 

가난한 천재에게 꽤 동기 부여되는 문장이다. 뤼시앙은 이 순간 가슴이 격정으로 휘몰아쳤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파리에서 결국 부인에게 버림 받고 외톨이가 되면서 바닥에서 새롭게 시작하게 된다.

주변을 보니 가난한 문인 친구들이 꿈을 키우고 있어서 이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 했지만 그는 너무 배가 고팠다. 열심히 준비해간 소설이나 시를 출판업자에게 보였지만 그들은 사업가였다. 속으로는 인정해도 겉으로는 1/4 이하 가격으로 후려쳐버린다. 실망한 그의 앞에 갑자기 빠른 길이 열렸다.

바로 신문이었다.

여기서 그의 재주는 단번에 인정 받아 돈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다가 서서히 마가 낀다. 글은 재주에 더해서 당파적 소견을 담아야 한다. 당시 파리는 왕당파와 자유주의자간의 불안한 대립이 계속 되고 있었고 여기서 누군가의 편에 서야만 했다. 나의 친구라도 반대편이라면 공격해야 하고 악당이라도 내 편이라면 옹호해야 한다. 마치 현대의 파당 정치처럼 말이다. 얼떨결에 돈 맛을 알게 된 그는 전쟁통에 급격히 휘말려 버린다.

발자크의 또 다른 작품 <나귀 가죽>을 보면 주인공은 목숨과 부를 바꾸게 된다. 뤼시앙 또한 양심을 팔아야 성공이 이룰 수 있게 된다.

잃어 버린 환상은 <나귀 가죽>이 간단히 보여주는 가죽을 통한 악마와의 계약을 매우 길게 늘려서 보여준다. 괴테가 80여세에 발자크의 작품을 보면서 감탄했다고 하는데 나귀 가죽 자체가 <파우스트>에 대한 오마주인 셈이다.

그리고 현대의 메피스토텔레스는 정치와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서 뤼시앙에게 파우스트 역할을 강요한다.

뤼시앙은 이렇게 자신에게 주어진 칼의 위력을 잘 즐겼다.

논조를 조금 바꾸기만 해도 그의 나무에는 금화가 주렁주렁 열린다. 우쭐해짐이 극에 달하자 서서히 반발이 일어난다.

그에게 바쳐지는 찬사는 사실 아부였고 아마 보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즘도 기업이 광고비를 보험비로 간주하듯이 말이다.

그가 너무 많은 것을 추구하다가 추락하게 되는데 속도가 너무나 빨랐다.

신문이라는 권력이 떨어져나가는 순간 그는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발휘했던 기회주의는 고스란히 그에게 칼이 되어 돌아온다.

 

앞서 지적 했듯이 이 작품은 고리오 영감과 비교도 되니 함께 보면 보완적이다.

주인공 뤼시앙은 고리오 영감의 라스티냑과 여러 모로 비교 된다.

둘 다 처음은 양심적이고 순진한 청년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고리오 영감의 표현에 의하면 항아리에서 빠져나오려고 서로 잡아 먹을 운명의 수천 마리의 거미 중 하나일 뿐이었다. 덕분에 서로 돕는 듯 하지만 어느새 경쟁이 시작되었고 라스티냑은 승자, 뤼시앙은 패자가 된다.

왜 이런 차이가 나왔을까?

라스티냑은 파리생활 초기에 순진했지만 곧 고리오 영감의 비극을 보면서 나서 완전히 재탄생되었다. 독한 수련 과정을 겪은 것이다. 덕분에 그는 양심을 철저하게 팔아 버리고 이익에 따라 움직여서 꾸준하게 성공의 가도를 달린다.

반면 뤼시앙은 훨씬 나은 재주가 있었다. 시와 소설에서 그의 재주는 라스티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출중했다. 그렇지만 결정적으로 그는 현실감이 떨어졌다. 아마 발자크가 자신을 투영한다면 라스티냑 보다 오히려 뤼시앙에게 더 근접할 것 같다.

 

여기서 다시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의 한 대목을 인용해보겠다.

그러나 발자크의 가장 내적인 소망보다 현명한 운명이 그에게 그런 성급한 행운을 주지 않았다. 운명은 그에게서 그보다 것을 원했기 떄문이다.

운명은 그의 안에 있는 정치가가 자신의 재능을 장관실에 팔아넘길 가능성을 차단하였고, 사업가 발자크가 투자를 통해서 꿈꾸던 재산을 얻을 기회를 거절하였으며, 그가 추구하던 부유한 과부들이 그에게로 길을 모두 가로막았다. 운명은 초기에 그가 가졌던 언론계에 대한 정열을 모든 신문잡지에 대한 혐오감과 구토로 바꾸어버렸다. 그를 되쫓아보내 책상 앞에 붙잡아두기 위해서였다. 책상에서부터 그의 천재성은 의회, 증권거래소, 우아한 소비생활의 좁다란 영역이 아니라 전세계를 지배할 있게 되었다.

운명은 형리처럼 잔혹하게 사랑과 권력과 자유를 무한히 갈망하는 쾌락주의자를 언제나 다시 노동의 감옥 속으로 되쫓아보냈다. 탈출은 언제나 허사로 돌아갔고 도주시도는 그에게 쇠사슬을 배로 만들어주었을 뿐이다.

 

독자들은 쉽게 발자크의 실제 삶이 라스티냑 처럼 약게 굴어 급속히 올라가지 못하고 끊임없이 추락해서 거의 도형수 처럼 글쓰기에 메달려야 하는 꼴을 잘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뤼시앙처럼 그의 삶은 추락을 반복하게 된다.

재능 있지만 성공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하지만 다시 끌려 내려오게 되는 신세 한탄.

이것이 바로 <잃어버린 환상> 속의 발자크의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