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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은

프레젠토 2013. 9. 28. 00:54

내 인생은 제삼자의 눈으로 돌아보자면 그리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숱한 잘못을 저지르긴 했어도 불행하다고까지는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행복한지 불행한지 따지는 것부터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나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을 잃는 것보다, 가장 불행했던

시절을 잃어버리는 게 더 힘들것 같다. 인간의 인생에서 중요한 일이란,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분명히 받아들이고 좋은 일과 궂은일을 빠짐없이

음미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외적 운명을 견디면서도 우연에 뒤바뀌지 않는,

본래 타고난 내적 운명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면, 내 인생은 초라하지도

형편없지도 않았다. 외적 운명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내게도 닥친다.

이는 피할 수 없으며 신이 내린 운명이다. 하지만 나의 내적 운명은 나

스스로 만든 작품이다. 그 쓴 맛과 단맛을 모두 맛보며, 그 책임을 오로지 나

홀로 지고 가려 한다.

 

어렸을 적 때때로 시인이 되고 싶었다. 만일 그 꿈이 이루어 졌다면, 나는 어린

시절의 아련한 어둠을 헤치고, 까마득한 기억안에 소중히 간직했던 원천까지

파헤치고 싶은 유혹을 이겨 내지 못하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 추억이 너무 귀중

하고 성스러워 내손으로 망가뜨리고 싶지 않다. 단 하나 말할 수 있는 사실은,

내 어린 시절은 아름답고 즐거웠다는 것이다. 나는 자유를 누리면서소질과 재능

을 스스로 발견하고, 마음속 깊이 기쁨과 슬픔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 미래를 하

늘이 내린 낯선 운명이라 생각지 않고 내 힘으로 거둬들인 운명이라 여겼다.

그렇게 나는 인기 없고 재능도 부족하고 말수 적은 학생으로서, 별다른 간섭 없이

여러 학교를 거쳤다. 어떤 조언을 해도 효과가 신통치 않자, 선생들은 마침내 나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예닐곱 살 때부터였을까.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든 힘 가운데 음악에 가장 강하게

사로잡히고 지배당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나 자신만의

세계를 갖게 되었다. 내 피난처요 내 천국인 그곳을 어느 누구도 내게서 빼앗을 수도

넘볼 수도 없었다. 나는 그곳을 어느 누구와도 나눠 가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음악가

였다. 열두 살이 될 때까지 악기 다루는 법을 배운 적도 없고, 장차 작곡으로 생계를

유지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말이다.

 

그 뒤에도 별다른 변화없이 그러한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므로 돌이켜 보건대 내 인

생은 다채롭지도 다양하지도 않았고, 처음부터 하나의 으뜸음에 맞춰져 단 하나의

별만 우러른 듯하다. 다른 일들이 잘 풀리든 잘못 풀리든, 나의 가장 내적인 인생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오랫동안 다른 일에 한눈팔고 악보나 악기에 손도 대지

않더라도, 선율은 언제나 내 피와 입술에 감돌았고 박자와 리듬은 삶의 숨결에서 뛰놀고

있었다. 여러 다른 길들을 해매며 구원을 받아 망각과 해탈에 이르기를 열망했지만,

신을 만나 깨달음과 평화를 얻기를 갈망했지만, 그 모든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곳은

오로지 음악뿐이었다. 굳이 베토벤이나 바흐가 아니어도 좋다. 어느 음악이든 이 세상에

있다면, 그리하여 인간의 가슴이 때로 박자에 뛰놀고 화성에 넘놀 수 있다면, 누구의

인생이든 늘 따뜻이 위로와 격려를 받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아, 음악이란 어떤

선율이 네게 떠오른다. 너는 그 선율을 소리 내지 않고 마음으로만 부른다. 네 몸과

마음이 그 선율에 젖어든다. 선율은 네 모든 힘과 움직임을 휘감는다. 그렇게 네 안에서

울리는 동안 네가 품고 있던 모든 우연한 것, 나쁜 것, 거친 것, 슬픈 것들을 없애고, 온세상

이 공명하도록 하며, 무거운 마음을 가볍게 만들고 경직된 영혼을 비상하게 만든다. 민요의

선율만으로도 그 모든 것이 가능한데, 하물며 화성으로서야! 각각의 음들이 이를테면 교회

종소리에서처럼 순수하게 조율되어 듣기 좋게 화음을 이루기만 해도, 마음은 우아한 매력과

쾌락에 휘감긴다. 그러한 화음은 음이 하나씩 더해질 때마다 더욱더 고조되어, 마음을 불타

오르게 하고 심지어 환희에 떨게 만들 수도 있다. 그 어떤 정욕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

이다.

 

예부터 여러민족들과 시인들은 순수한 행복이란 과연 무엇일까 상상해 왔는데. 나는 그중에서

천체의 화성을 들을 수 있는  행복이 최고의 무구한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마음속 깊이

황금색 꿈을 꾸며, 눈 깜짝하는 순간 우주 질서와 생명 전체가 은밀히 태초의 화성을 내는것을

듣곤 했다. 아, 인생은 어찌 이리 어수선하고  그 곡조가 어긋나고 거짓투성이일 수있을까.

어떻게 인간들 사이에 거짓과 사악과 질투와 증오만 남아 있을 수 있을까.아무리 짤막한 노래라도,

아무리 수수한 음악이라도, 맑게 조율된 음들이 순수하게 울리고 화성을 이루며 다정히 어우러지면

천국이 눈앞에 열린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알려 주는데! 하기야 나 자신도 내 인생을 그 어떤

노래나 어떤 순수한 음악처럼 만들고자 안간힘을 다했으나 그렇게 만들지 못했으니, 어찌 세상을

나무라고 노여워할 수 있을까? 내 마음속 깊은 곳에 거스를 수 없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순수하고

쾌적하고 스스로 행복하게 울려 퍼졌다가 은은히 사라지는 음처럼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다.

하지만 내 인생은 우연과 불협화음으로 가득 차 있으며, 어디를 가든,어디를 두드리든 순수하고 맑은

음이 그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는다. 

사설은 이쯤 해두고, 이야기르 시작하겠다. 내가 이 글을 누구를 위해 쓰고 있는지, 도대체 누가 내게

그리도 엄청난 힘을 미쳐서 내가 고백하게 만들 수 있으며 내외로움을 달래 줄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느 그리운 여인의 이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이름은 내체험과 운명을 고스란히

품어 안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별이자 드높은 상징으로 내 모든 것 위에 떠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으리라.

 

헤르만 헤세

게르트루트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