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목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머금고, 숲속 길들은 메마르고, 시월의 황혼 아래 물은 고요한 하늘을 비치는데, 돌 사이로 넘쳐흐르는 물위에는 백조가 쉰 아홉 마리 떠 있다.
내가 처음 그 수를 세어본 이래 열 아홉 번째 가을이 다가왔다. 그때 나는 보았었다, 다 헤아리기도 전에, 돌연히 모두 날아올라 요란스런 날개 소리를 내며 끊긴 큰 원으로 돌다 흩어지는 것을.
저 눈부신 백조들을 봐 왔건만, 지금 내 가슴은 아프다. 모든 것이 변했다, 해질녘, 이 호숫가에서 처음으로, 머리 위에 저 영롱(玲瓏)한 날개소리 들으며, 한층 가벼운 발걸음으로 걸었던 이래로.
아직도 지치지 않고 사랑하는 것들끼리 백조들은 차갑고 다정한 물결에서 헤엄치거나 공중으로 솟아오른다. 그들의 가슴은 늙지도 않아, 어디를 돌아다니든 열정과 패기가 여전히 그들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이제 백조들은 고요한 물위에 신비롭고 아름답게 떠 있는데, 저것들이 어느 호숫가 웅덩이 옆 어떤 골풀 속에 둥지를 틀고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할 것인가, 어느 날 내가 잠 깨어 그들이 날아간 것을 알게 될 때?
□해설□
이 시는 추색이 짙어 가는 10월의 저녁 무렵 활기찬 야생 백조들이 유유히 떠 있는 쿨 호수의 아름다운 정경을 배경으로, 실연의 쓰라린 상처를 안고 노년기에 들어선 시인 예이츠 자신의 막막하고 참담한 심경을 객관적 상관물의 수법으로 표현한 서정시이다. 이 시의 1연에 설정된 시간적 배경은 바로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시인의 이미지와 잘 어울리는 반면, 2, 3, 4연에 묘사된 아름답고 고요한 정경 속에 떼지어 노닐거나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백조들의 모습은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노쇠해 가기만 하는 시인의 처절한 처지를 대조적으로 극명하게 드러낸다. 예이츠가 이 호수를 처음 방문한 것은 그의 나이 32세 때 모드 곤(Maud Gonne)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슬픔에 빠져 있던 1897년 가을이었다. 그리고 이 시가 쓰인 시점은 그로부터 19년의 긴 세월이 흐른 1916년 가을 예이츠의 나이 51세 때인데, 이 때 그는 1916년 부활절 봉기 사건의 주동자로 곤의 남편 존 맥브라드 소령(Major John MacBride)이 처형되고 나서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청혼했다가 또 다시 거절당하고, 그녀의 딸 이졸트(Iseult)에게서까지 청혼을 거절당한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때였다. 이렇듯 시인은 처음 이 곳을 방문했던 젊은 시절에 그랬듯이 노년기에 접어든 지금도 여전히 그의 연인에게서 받은 실연의 상처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지만,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호수 주변의 가을 풍경과 지칠 줄 모르는 야생 백조들이 빚어내는 광경은 그에게 위안을 주기는커녕 그의 가슴을 아프게 해줄 뿐이다. 그것은 그래도 시인이 젊었던 그 시절에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자연과 동화되려고 노력하며 백조의 수효를 헤아려보기도 하고, 가벼운 발걸음을 옮기며 백조가 헤엄치거나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건만, 이제는 그의 모든 것이 변해버려 저 백조들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계의 것들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한 채 다 헤아려보기도 전에 백조들이 돌연히 날아 가버렸다고 한 것은, 정화되지 않은 현실 속의 인간으로서는 순수하고 청초한 백조들의 존재질서에 합류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기도 한다. 사랑도 얻지 못한 채 가슴에 멍들고 힘없는 늙은이가 된 시인과는 달리, 저 백조들은 지치거나 늙지도 않고 여전히 열정과 패기를 지니고서 차가운 물 속에서도 짝들끼리 다정하게 헤엄치거나 힘차게 하늘로 솟아오른다. 요컨대, 시인에게 있어 야생 백조는 단순히 유한한 자연계의 미물이 아니라, 신비로운 존재로서 지상과 하늘의 두 영역을 넘나드는 멸·불멸의 이중적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시인이 즐겨 쓰는 "아홉(nine)"이라는 숫자는 시인과 직접 관련된 실제의 숫자이면서도 이 백조들의 신비성을 한층 더 강화해준다. 또한 유한하고 속절없는 자연세계의 삶에 얽매여 있는 늘그막의 시인으로서는 저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활기차게 사는 백조들이 한없이 부럽기만 하다. 따라서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그가 죽어서 영적인 존재로 눈을 뜰 때, 편재성(遍在性)을 띤 저 불멸의 백조들이 어디에 둥지를 짓고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줄 것인지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시인 자신이 죽어서 불멸의 영적인 존재가 되고 나면, 저 백조들은 또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면서 불멸의 세계로 이끌어주리라는 믿음의 피력이라고 볼 수도 있다.
-------------------------- 제목. Coole: 그레거리 부인(Lady Gregory) 소유의 장원 Coole Park에 있는 호수의 이름. l. 7. The nineteenth autumn: 시인 예이츠가 이 호수를 처음 방문한 것은 그가 32세였던 1897년 가을이고, 이 시를 쓴 시점은 그로부터 19년이 지난 1916년 가을로 그의 나이 51세 때였다. 예이츠는 19년 전이나 노년기에 들어선 지금이나 여전히 그의 연인 모드 곤(Maud Gonne)에게서 받은 실연의 상처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었다. l. 29. when I awake some day: 언젠가 내가 죽어서 영적인 존재로 눈을 뜰 때. 이세순 (중앙대)